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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은 물론이고

by May

나에게/혀와 입술이 있다//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견딜 수가 없다, 내가//안녕,이라고 말하고/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라고 대답할 때//구불구불 휘어진 혀가/내 입천장에/매끄러운 이의 뒷면에/닿을 때/닿았다 떨어질 때…(중략)…//혀가 없는 그 말이어서/지워지지도 않을 그 말을


- 한강「해부극장 2」 일부


일상적으로 내뱉는 안녕이란 말속에 진심으로 상대방의 안녕을 기원하던 순간이 있던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을 때 진정 상대의 생각이 궁금하기 때문이었던 적이 있던가, 정말이에요라고 말할 땐 상대의 의심 어린 눈초리에 맞서 내 진심을 전하고자 하지만 그 말로써 오히려 진심은 빗겨나가지 않던가. 한강 작가가 '견딜 수 없던' 건 이런 것들이다. 말 뿐인 말, 진실을 정확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 혀가 없는 말을 내뱉어야 하는 순간들.


또 하나 찾아볼까.


'물론' 가능한 한 말에 진심을 전하려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으나, 적확하게 그 언어의 한계를 극복해 내는 사람은 극소수다.


'물론'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말할 필요도 없는 것, 우리는 그 앞에 물론을 붙인다. 그러나 용례는 본래의 의미와 다르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박, 보편적인 진리, 타인의 의견 같은 것들을 물론이라는 말로 묶어 그 범위를 아주 작게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나(-으나)' 뒤에 올 자신의 핵심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하는 형국이다. 대표적인 혀가 없는 말 중 하나다.


물론이라 말함으로써 우리는 진실을 놓쳐버리고, 의미와 달리 타인을 배제하여 주체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고 만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도달한 결론은, 허울만 좋은 거짓 합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정도는 너를 인정하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얘긴 이거야." 타인이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다.


중요한 건 타자성을 감각하는 일이다. 이번 대선을 거치며 나는 어떤 정치 집단에도 속해있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내가 뽑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난세의 영웅이라 칭하며 "국민의 승리"를 운운하는 이들의 모습은 꽤나 불편했다. 의견이 다른 타자를 제거하려 했던 이들을 지지했을지라도, 그들을 다시 제거하는 방식으로는 세상은 절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뿐만 아니다.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도 심히 충격을 받았다.


여태껏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했던가. 역시나 '물론'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당신들의 존재를 일부 인정하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다는 식의 대응이었다. "물론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어쩌고저쩌고..."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들과 나의 의견 차이를 차치하고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지 못하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타자성에 대한 감각은 불편하고 충격적이다. 나는 그 앞에서 어김없이 분노했고, 분노는 겸손해야 한다는 전언으로 남았다.


랑시에르는 '불일치'를 긍정할 때 비로소 타인과의 진정한 상호작용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불일치를 성급하게 봉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혀 없는 말을 사용하고 있을까. 견딜 수 없는 마음은 타자성이 주는 불편함이 아니라, 그 불편함을 피하려 적확하지 못한 언어로 진실을 가리려 하는 우리 자신을 향해 있어야 한다. '물론'은 '물론'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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