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슈슈의 모든 것>
아이들의 세상은 좁다. 학교라는 물리적-상징적 공간은 아이들의 자유를 극히 제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불신 때문이다. 아직 미성숙한 존재이기에 당장 모든 자유를 내어줄 순 없다는 것이 어른들의 논리다. 아이들은 딱히 의문을 가질 기회도 없이 자유를 박탈당한 채 좁디좁은 공간에 갇혀버린다. 미셸 푸코가 감옥이라고 했던 것도 과한 은유가 아니다.
인간의 내면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본능', '불안', '욕망', '진의', 무의식' 같은 단어들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어른들이란 그 무언가를 잘 감추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더 정확히는 내 안에 정체 모를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이다. 저 안에 담아두고는 있지만 애써 그것을 외면하지 않으면, 소위 사회화된 인간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규율을 내면화한 것이다.
반면 아이들은 미성숙하다. 미성숙이란 그 '무언가'를 감추지 못한다는 것. 그들의 처지는 꽤나 곤란하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데 어른들은 새삼 평화로운 표정을 하고 이를 모른 체한다. 모른 체하는 것인지, 실제 잊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받는 것이다. 사실 모두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데 말이다.
아이들의 삶은 더없이 취약해진다. 좁디좁은 그들의 세상 속에서 내 안의 그 무언가에 의해 끊임없이 추동당하는 타인과 어울려 살아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부모의 변덕, 믿었던 친구의 배신, 선생님의 무관심 정도만 얹히면 그들은 어김없이 무너지고 만다. 아이들에게 남은 건 아주 협소한 선택지뿐이다. 정체 모를 무언가를 휘두를 것인가, 휘두르지 않고 있다 피해자가 되어 버릴 것인가. 이 지옥 같은 현실은 연쇄적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악순환이다.
릴리 슈슈의 음악에는 그 '무언가'가 담겨 있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기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하는 것. 느낄 수는 있으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이자, 욕망의 원초적 에너지이자, 완벽한 평온의 상태로 추정되나 누구 하나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는 것. 바로 에테르다. 현실의 폭력성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망할만한 초월적인 탈출구이다.
에테르는 두 가지 층위로 해석될 수 있다. 종교학에서 '성(聖)'이란 인간의 일상을 초월한 차원 그 자체를 말하고, '성물(聖物)' 그 성(聖)스러움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의미한다. 인간은 인간의 오감으로 성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오직 성물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 현현한 성을 간접 경험할 뿐이다. 종교적 도식으로 보자면 에테르는 곧 성이고, 릴리슈슈와 그의 음악은 성물이다.
성스러운 것은 보통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는 금기로 설정된다. 성스러운 것은 금지된 욕망에 대한 상징적인 형상이기도 하다. 성에 대한 경외심은, 추동하는 본능에 대한 두려움이자 이미 엎질러버린 것들에 대한 죄책감이다. 저 너머에 있는 듯 하지만 사실 우리 안에 있는 것, 강렬하게 느껴지지만 현존하지 않는 것, 드러나지만 우리와 섞이지도 않고 섞여서도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따돌림을 당하며 자기만의 고독 속에 살아가던 쿠노, 그저 명량한 아이로 지냈을 뿐인데 악순환의 굴레에 놓인 츠다, 어찌할 바 모르겠는 분노를 삼키는 대신 주변을 해하기로 선택한 호시노, 그리고 그런 그들 모두의 삶을 이해하는 한편 약자라는 이유로 그들 모두의 삶을 무너뜨리는 선택을 해야만 했던 유이치.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릴리슈슈를 좋아하고, 각기 다른 에테르를 품고 살아간다.
자신들 외에 많은 사람들이 에테르를 느끼고 있다는 것, 마음 깊은 곳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불덩어리 하나쯤은 안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러나 네 아이들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복잡한 피가해 관계 안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비극적인 상황은 그들에게는 세상의 전부다. 어느 누구도 현실에서는 자신의 마음속의 에테르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지 못한다.
릴리슈슈의 공연 날, 유이치는 그동안 웹사이트에서 릴리슈슈에 대해 채팅을 나누었던 상대가 호시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호시노에게 티켓을 빼앗기고 공연 내내 공연장 밖에서 서성였던 유이치, 릴리슈슈의 음악을 듣는 것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 구원을 꿈꾸는 것이었으나 역시나 에테르를 감당하는 것조차 쉽지는 않다. 츠다와 쿠노에 대한 죄책감, 호시노에 대한 분노와 연민 사이에서 유이치는 단 하나의 남은 선택지가 호시노를 살해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지나온 입장에서 흔히 사춘기를 아름답게만 포장하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 시절은 폭력과 모멸 그리고 자기혐오가 뒤섞인 작은 지옥에 가깝다. 그것도 어느 때보다 커다란 불덩어리를 가슴에 품은 인간들이 한데 모여 살아가는 아주 좁디좁은 세상. 그들은 제3의 선택지를 상상하지 못한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그들은 양자택일의 선택지 앞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을 반복한다. 그저 덜 어리석은 선택이기를, 내게 덜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기를 바라며.
인간에게 본질이라는 게 있다면 살면서 가장 그 본질에 가까운 시절. 그러나 그런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세상과 그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나. 누군가는 처절하게 무너지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인간은 날 수 없는 존재다. 간절히 구원을 바라지만 어느 누구도 구제받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간신히 어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