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지옥이다. 단순한 철학적 구호를 넘어 신지에게는 삶을 관통하는 절대적 진실이다.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의 멸시, 그리고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관계, 의도를 어김없이 빗겨나가는 행동의 결과들. 사랑에 대한 갈망과 누적된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나와 타인을 가르는 경계인 AT필드를 완전히 소멸시킴으로써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되는 절대적 합일을 꿈꾸기에 이른다.
서드 임팩트가 실행되고 전 인류의 영혼은 하나의 의식으로 합쳐진다. 신지의 바람과 달리 타인과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그야말로 무형 무상의 존재론적 공허 상태다. 타인은 지옥이면서 거울이기도 한 존재, 내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 사라지면 나조차도 흐릿해진다. AT필드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나라는 개념이 소멸해 버리는 것이다. 신지는 자신이 바라던 세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타인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현실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현실로 돌아온 신지는 닿고 싶었지만 끝내 닿을 수 없었던 아스카와 마주한다. 마음을 먹고 돌아왔음에도 거절, 갈등, 죄의식으로 대변되는 아스카를 마주하는 순간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다. 그 두려움은 타인을 무화시키려는 폭력으로 변모한다. 신지는 아스카의 목을 조르며 '통제 불가능한 타자'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아스카는 목을 졸리면서도 신지의 뺨을 쓰다듬는다. 타자성이란 무한의 모습으로 언제나 자아를 뛰어넘는 것. 신지는 타자성의 숭고함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폭력을 멈춘다. 레비나스가 말하듯 타자의 얼굴은 곧 윤리적 명령이다. 폭력 앞에서도 다정한 손길을 내밀며, 숭고한 존재임을 선언하고, 신지는 윤리적 한계를 체감한다. 타인을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비대한 자아는 다시금 영원한 고독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분 나빠." 아스카는 서드 임팩트로 인해 신지와 하나의 의식이 되어 그의 가장 깊은 외로움까지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지의 감정과 욕망에 동화되기를 거부한다. "나는 너에게 종속될 수 없는 완전히 독립적인 주체(타자)이자, 너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일 수 없다"라는 타자성의 선언이다. 이로 인해 윤리적 거리는 더욱 명확히 정의된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정의의 전제는 타인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자명한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불안정하고 상처를 주고받고 그 속에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지옥은 이를 거부하고 폭력적인 무언가로 타인을 통제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비대한 자아로 인해 누군가는 세상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나조차 잃어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