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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 딴에는

강렬한 사랑은 언제나 미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체인소맨, 헤어질 결심

by May

우리의 바람과 달리, 인간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기억되는 사랑은 언제나 미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철학자 한병철이『에로스의 종말』에서 말하듯, 완성된 사랑은 매끄럽게 소비된다. 자아와 타자의 원만한 결합이다. 반면 미결된 사랑은 결합을 이루지 못한 채, 타자의 숭고함을 영구적으로 보존한다. 그 숭고함이란 도저히 자아가 어찌할 수 없는 것.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걸리적거리고, 깊은 곳에 상처를 내고, 쉬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나, 『체인소맨』의 레제가 남긴 것처럼 말이다.


원만한 결합은 소멸하는 쾌락이다. 가장 뜨거웠던 한 때를 보내고, 비교적 영구적으로 미래를 약속하는 그 순간 더 이상 내일의 즐거움은 오늘의 그것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완성된 사랑의 상태에서 타자는 내가 이해할 수 있고 통제 가능한 영역에 위치 지어진다. 일상의 권태는 이를 가속화한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타자라는 아이러니한 상태 속에서 서로의 신비를 유지하기 위한 애처로운 투쟁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결된 사랑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가장 강렬했던 희망의 순간에 멈춰 선 채, 우리는 사랑의 정점과 파국을 일치시키고 멀찍이 떨어진 타자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빙부처리된 타자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구조적으로 남아 버린다. 완벽하게 낭만적인 환상은 자아의 남은 삶을 지배하는(경우에 따라는 너무 과격한 언어일 수 있겠으나) 일종의 기호로 남는다.


서사적 불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왜 레제는 카페에 오지 못했는가?", "서래는 왜 목숨을 저버리고 미결 사건으로 남았는가" 타자를 잊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경계에서 자아는 헤매게 된다. 이 지점에서 타자는 영원히 소비되지 않고, 반영구적으로 재생된다. (물론 체인소맨의 경우, 덴지가 아닌 관객들이 그 헤매는 '자아'의 위치에 놓인 듯하다.)


그런 한편 기호화된다는 것은 영원한 타자화이다. 현존하는 인격체가 아닌 상징 혹은 욕망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돌발 행동'을 하면서도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짚을 필요는 있다. 기억나는 남성 캐릭터가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미결된 사랑의 서사는 종종 여성의 희생과 부정을 통해 그 강렬함을 얻는다. 이는 미결된 사랑의 미학이 수많은 작품에서 소비되는 방식이며 꽤 먹히는 서사 구조이다. 두 작품 모두 이를 답습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다만 레제와 서래의 또 다른 공통점은 자신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는 부정성을 껴안았다는 점이다. 시골쥐가 되고자 했던 꿈을 포기하고 덴지를 선택하면 어떻게든 마키마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았던 레제, 자신의 살인죄를 씻고 해준에게서 떠나 평범한 일상을 살아낼 수 있었던 서래. 사랑을 '네 삶을 이루는 것들 중 무언가를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느냐'는 기준으로 정의한다면, 둘은 삶 전체를 포기할 만큼 사랑을 실천했다. 망설이던 덴지와 해준에 비하자면, 진실된 사랑을 향한 강력한 주체적 행위였음은 틀림없다.


먹히는 코드인 미결된 사랑의 이야기는 단순히 콘텐츠의 재미 요소일 뿐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타자화된 대상이자,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던 두 주체의 자기 파괴적 선택 덕에 관객의 마음속엔 애틋함이 남는다. 완성된 사랑보다도 더 분명하게, 더 영속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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