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발붙인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 믿는 이들 중 열에 하나는 성공하고, 열에 하나는 사고를 치고, 열에 여덟은 고통을 받는다. 영화 <버드맨>의 주인공 리건은 셋 모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히어로 영화 버드맨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이미 늙어버린 히어로는 더 이상 어디서도 불러주질 않는다. 그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대중 영화보다 더 예술의 본질에 가까운 연극에 도전한다.
하늘을 훨훨 날았던 버드맨에게 주인공이 아닌 삶은 버겁기만 하다. 땅에 발을 붙이고 걷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것인지 그는 뼈저리게 체험한다. 고용한 배우는 사고를 치고, 딸은 마약에 취하고, 브로드웨이 평론가는 리건을 두고 '배우'가 아닌 '연예인 나부랭이'라며 힐난한다.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을 받고 싶지만, 그가 연출한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 연극 버전도 어딘가 키치하고 유치하다.
리건은 짐짓 무게를 잡고 진짜 예술을 하고 싶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사람들은 그를 보면 "버드맨!"이라고 외친다. 과거의 영광은 내면의 목소리로 남아 그를 괴롭힌다. "히어로 영화나 또 찍어서 사람들을 지리게 만드는 거야! 넌 훨훨 날아오르는 거지!" 그렇다. 리건의 예술은 "나는 여전히 중요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의 변형이다. 스스로를 삶의 주인공이라 굳게 믿었던 그는, 삶의 어느 순간에도 제대로 존재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지겹도록 투쟁한다.
예술가로 증명받고 싶었던 그의 갈망은 팬티 바람으로 브로드웨이를 질주하는 기괴한 해프닝으로 배신당한다. 그리고 불특정 다수의 온라인 군중에 의해 '바이럴'된다. 세상의 관심은 이렇게 작동한다. 내가 어떤 것에 목을 매고 있건 고통받고 있건 관심이 없다. 세상의 인정은 나의 바람을 계속해서 빗겨나간다. 인정받을 수 없겠다는 좌절인지, 인정의 부조리에 대한 순응인지 모르겠지만, 결국 연극이 오르는 그날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리건이 연기하는 역할은 아이러니하게도 에드다. 에드는 사랑을 갈구하다, 사랑하는 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끝내는 자살을 하는 인물. 리건은 "나는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는 거지?" 대사를 읊조리고는 실제로 자신의 머리를 겨냥해 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조준으로 인해 리건은 목숨을 구한다. 병실에 누워있는 그의 표정은 평온하다. 왜일까.
그날의 극은 호평 일색이다. 리건을 비난하며 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악평 일생의 칼럼을 써두었던 평론가 타비사도 마음을 바꾼다. 칼럼의 제목은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이라는 뜻이다. 리얼리즘의 새 지평이니 거창하고 현학적인 단어들을 늘어놓았지만, 그의 칼럼은 리건 톰슨을 여전히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지 못하다. '대중들의 SNS의 바이럴'이나 '평론가의 현학적인 언어'는 삶의 진실(A thing)을 가리는 쪽으로 작동한다.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리건의 평온한 표정은 평론가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도, 연극이 끝내 성공했기 때문도 아니다. 비루했던 늙은 히어로가 다시금 영광을 되찾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그토록 자신이 갈망하고 있던 것이 'A thing'이 아니라 'what is said of that thing'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갈구하던 인정이 삶의 본질(A thing)이 아닌, 그 주위를 떠도는 가벼운 소음(What is said of that thing)이었음을 목도한 자의 해탈인 것이다. 가짜가 가짜를 극찬하는 연극적 부조리가 우리 삶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위대한 예술가이며, 내 삶을 증명한다.'는 허위 서사는 '나도 인간이고, 주인공이 아니어도 뭐 괜찮은 삶이야'라는 비교적 진실에 가까운 명제로 자리 잡는다. 이는 비겁한 순응이 아닌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악순환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발 붙인 이 세계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이 세상에 발 붙이게 한다. 날개를 달고 버드맨처럼 훨훨 날아가야만, 성공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상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인간은 땅에 발을 붙인다. 삶에서의 추락이 아닌, 우리를 바로 지금 여기에 단단히 발붙이게 하는 숭고한 중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