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내 딴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 앞에서,
이해를 시도해 보는 경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by May

강릉의 밤바다를 종종 찾는다. 새까맣게 깊은 바다가 파도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켜켜이 쌓인 군더더기 같은 감정들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세상만사가 판단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물론 강릉의 바다가 아름답기 때문은 부정할 수 없으나, 이 감각은 단지 심미적 쾌감에만 기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그 앞에서는 의미를 계산하느라 곤두서 있던 감각들이 이유도 묻지 않고 힘을 잃는다. 그렇게 비워진 자리엔 아이러니하게도 공허가 아닌 충만함이 남는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탓에, 우리는 종종 자연을 인간을 품어주는 따뜻한 존재로 오해한다. 그러나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자비로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너 하나쯤 어떻게 되어도 이 세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삶의 무게에 대한 차가운 농담에 가깝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은 살면서 필연적으로 부조리를 마주하게 된다고 말했다. 인간은 세계에 의미를 기대한다. 자연을 바라보며 날 좀 위로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본래 의미도 판단도 부재한 장소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제목처럼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 가치중립적인 곳이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건 착하려고 애를 써왔건, 세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인간 중심적 사고로는 도저히 포섭할 수 없는 부조리다.


영화를 착실히 따라가다 보면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 이를 방조하는 정부, 그리고 무기력하게 그들의 계획을 실행하려 일하는 직원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를 '악'으로 정의하게 된다. 심지어는 갑자기 자연에 매료되어 글램핑장 경비를 자처하는 타카하시는 우스워 보이기까지 한다. 마을 사람들은 어떠할까. 그들에게 자연은 삶의 터전이다. 기업 사람들과 달리 그들에겐 자연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자면 보다 친자연적이라 위치 지을 수 있겠으나, 그들 역시 설득과 협의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 언어도 끝내 인간 내부에서만 유효하다. 자연은 그 논리에 동의하지도, 반박하지도 않는다. 통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조금 자연과 가까이 산다고 해서 자연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는 것도, 인간을 지켜주는 신령적 존재가 되는 것도 자처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악은-존재하지-않는다_스틸_2_JPG.jpg 하나


하나는 자연 속에서 자라난 아이다. 말 그대로 나고 자란 곳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했듯,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사슴의 새끼를 건드리는 순간 어미의 공격은 불가피하다. 인간이 포섭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언어화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추측건대 하나는 인간의 총에 맞은 새끼 사슴이 안쓰러워 다가갔을 것이다. 이 사건에는 비난할 대상도 책임을 물을 주체도 없다. 벌어진 사건에 대하여 누구도 탓할 수 없고, 그저 그 압력만을 감당해야 하는 처지이다. 요컨대 나약한 인간으로서 자연의 타자성을 처절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를 목도한 타쿠미는 자연에 동화된다. 새끼 사슴을 보호하는 부모 사슴이 그러하듯, 타카하시를 공격한다. 인간의 질서를 이탈하는 것이다. 타카하시가 기업의 직원이어서도, 자연의 매력적인 부분만 취하려는 어리석은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그저 다친 자식에게 접근했기 때문이다.


세계는 언제든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우리를 적대할 수 있다. 의미와 질서를 강박적으로 설치하면서, 자연의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되어 버린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의미의 체계는 그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선과 악이라는 저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순간, 도덕과 규범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당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영화의 결말은 묻고 있다.


이해되지 않는 것 앞에서, 이해를 시도해 보는 경험. 이를 수용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오만한 관찰자가 아닌 자연과 마주한 주체적 타자로써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의 자의식 과잉을 해체하고, 기꺼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경험이다. 자연은 이용되거나 이해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세상은 차갑고, 우리는 다만 여기 두 발을 붙이고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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