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불안과 표백된 행복 그 사이 어디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by May

기성 사회의 질서 안에서 무결하게 제 몫을 수행하는 존재, 즉 가치중립적 의미에서의 '어른'이 되는 경로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언어화되지 않는 내면의 불안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 또 하나는 그 불안의 원인을 외부의 대상에게 투사하고 이를 이해 가능한 논리로 박제해 버리는 방식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언어화해 버리는 것이다.


고로 어른이 된다는 건 다소 비겁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갖고 있는 불안을 곧이곧대로 바라보지 않고, 한 층의 레이어를 덧대어 내 삶에 안정적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인과의 관계에 미칠 악영향, 그리고 그것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뒤로해두고, 기본적인 원리 자체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미나토의 불투명한 행동을 해독하기 위해 호리라는 외부의 가해자를 상정해 버리는 사오리나 손녀와 관련한 거대한 죄의식을 학교라는 시스템을 앞세워 철저히 묻어두고 살아가려 애쓰는 교장이나 이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오리와 교장은 각자의 방식으로 불안과의 안전거리를 확보하며, 자신들이 만든 서사 뒤로 숨어버린다.


일종의 합리화 장치이다. 삶의 의미는 이렇듯 자기 보존을 위한 주관적 서사, 즉 합리화의 연속선상에서 비로소 그 윤곽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쉬이 우리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 내가 만들어둔 서사 위에 방점을 찍을만한 몇 가지 단어만 있으면, 누군가를 절대 악으로 치부하여 마음대로 자신의 불편감을 해소하려 하기도 하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냉혈한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행하기도 한다.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이 나 개인의 삶을 뒤엎어버릴까 하는 불안에 조급해하는 것이다. 영화가 동일한 사건을 세 번의 시점으로 변주하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불안을 가리기 위해 덧댄 레이어를 하나씩 벗겨내는 과정과도 같다.


흔들리지 않는 자명한 진실은, 자신이 만들어 둔 지옥(한계) 안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허덕임의 토대 위에서야 비로소, 그러니까 너도 나도 그렇게 비겁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상호 공감을 기반에 두고서야 연대할 수 있게 된다.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교장과, 아버지로부터 '인간이 아닌 돼지'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해야 했던 그리고 이를 묻어두는 방법도 언어화하는 방법도 알지 못했던 요리는 힘껏 트럼폰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그럼에도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향해 걸어간다.


행복은 한껏 표백된 성인군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리적으로 그러한 것도, 당위적으로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산사태가 밀려오고, 폭우가 내리고, 태풍이 부는 진흙탕 같은 삶 속에서도 종종 맑게 갠 하늘이 모습을 보인다. 무언가 특별히 달라져야만 하는가? 산뜻한 행복의 순간이 우리를 찾아오는 이유는, 우리가 근본적 변화를 꾀했기 때문은 아니다. 요리와 미나토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우리일지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전제로 하는 의미의 구원이 아니다. 언어화하지 못한 비명을 트럼폰에 불어넣었듯,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우리와 세상을 연결하는 그 집요한 호흡 안에 행복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날아갈 수 없음과 추락은 동의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