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의 기억과 기억의 쓸모

<애프터 양>

by May

그리 대단할 건 없더라도 남들 사는 만큼의 궤도 위에 다행스럽게도 안착해 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위로가 된다. 한 사람 몫의 밥벌이를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밥벌이라는 게 참 묘한지라, 그런 평이한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어김없이 무너지게 될 때가 있다. 내가 세상이 필요한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의 노동이 판매 가능한 것으로 인정받았을 때야 비로소 드러난다. 노동이 교환 가능한 가치로 환산되는 순간, 인간의 고유성은 기능으로 환원된다. 기능으로 환원된 삶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의미라고 부르기로 합의한다. 그것은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한 합의이면서도 동시에 언젠가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허구다. 도구적 쓰임에 '일의 의미' 따위의 거짓말을 덧대어 스스로를 설득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그 믿음이 벗겨지는 순간이 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거짓말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반복적으로 행한다. 서로가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도 속이는, 그리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살고 있다. 이 사회 속에서 물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그 위에 납득 가능한 의미를 덧대어 존재의 흔들림을 합리화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방식으로 삶의 균형을 유지한다. 우리의 밥벌이는 돈이라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가치가 매겨진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1인분의 몫에는 명확한 역할이 있는 편이다. 이러한 물화의 구조는 인간관계를 넘어 존재 이해 방식까지 스며든다. <애프터 양>의 주인공 제이크는 입양한 동양인 딸에게 '동양의 문화를 전수하는 도우미' 역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AI 안드로이드 '양'을 구매한다. 그는 바쁜 부모의 빈자리를 대신해 양은 자기 몫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한다. 딸은 양을 곧잘 따르며 동양 문화를 배워간다.


그러나 양은 어느 날 갑자기 작동을 멈춘다. 양의 고장을 마주한 제이크의 첫 모습은 귀찮음이다. 슬퍼하는 딸을 위해 양을 고치려 애쓰면서도, 내심 새로 사면 그만이라고 여긴다. 그는 양을 가족이 아니라 딸의 문화 교육을 수행하는 기능으로 바라보고 있다. 양을 수리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를 만나며 전전긍긍하던 제이크는 어느 날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는 물화된 존재인 양에게 기억은 불필요할 것이라 여겼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사실의 파편, 그리고 그 파편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한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두 귀로 들었던 것, 이를 객관이라 명명한다.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기능으로 환원된 존재는 반드시 측정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측정 가능성은 언제나 ‘객관’이라는 이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양의 기억은 제이크의 편견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양의 기억 속 남아있는 장면들은 그저 사실 나열뿐인 데이터가 아니다. 자신만의 관점을 프레임 삼아 사건을 바라보고, 인상 깊었던 순간들을 편집 저장한 삶의 서사에 가깝다. 더구나 중고품이었던 양은, 제이크는 알지 못했던 두 번의 삶에 대한 기억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 주체적으로 확립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특정한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기억과 양의 기억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물론, 자신이 알던 양과 진짜 양의 모습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양의 기억은 기억을 객관적 사실로 치부하는 착각이 틀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이를 단순히 비인간 AI가 인간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음을 알아챈, 감동적인 사건 정도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객관에 대한 맹신은 물화를 가속화한다. 도구적 쓰임이란 돈이라는 가치로 환산되는 것이며, 그 가치는 다시 돌아가서 필히 객관적 기준에 근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측정 가능한 것만이 가치로 인정받는다. 새로 사면 그만이라고 했던 제이크의 관점은 여기에 기저를 두고 있다. 도구적 쓰임을 좇는 인간 자아는 자신의 주관을 객관이라 믿는 동시에 자아의 범위를 제한 없이 확장시킨다. 내가 바꿀 수 없는 대상을 물화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자아의 질서 안으로 끌어들인다.


물화는 통제 욕망이다. 타자를 기능으로 만들면 불확실성이 제거된다. 요컨대 제이크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자신의 불안을 양으로써 상쇄해 왔던 것이다. 그 역시 1인분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크가 뒤늦게나마 알아챈 건 이것이다. 그저 데이터 더미로써 어디까지나 자신의 요구에 맞게 기계적으로 1인분의 몫을 해내고 있던 무언가가, 자신과 다른 기억을 가진 주체적 타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견지했던 질서가 틀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화된 세계의 견고함에 균열을 내는 건 거창한 혁명이 아니다. 물화는 타자를 기능으로 환원할 때만 유지된다. 물화된 객체로서의 밥벌이는 고단할 것이다. 시스템은 우리에게 자비 없이 1인분의 기능적 역할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제이크가 양의 기억을 통해, 나의 주관이 결코 닿을 수 없는 타자의 고유한 시선이 바로 저편에 존재함을 깨달았듯 역으로 나의 고유성 또한 이편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타자를 기능으로 환원했다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 기능으로 환원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순간, 나의 고유성도 구조 안에서 복권된다. 서로의 기능적 역할 너머, 내가 닿을 수 없는 타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음을 눈치채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나 다르지 않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일 것이다. 그 순간에야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궤도 위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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