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몸의 고통 위에 세워진다

영화『로마』, 소설『사양』

by May

어렸을 적,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가야 했던 때가 종종 있었다. 다른 집들은 다들 제자리를 지키는데 왜 우리 집만 그래야 하는지, 불만까지는 아니지만 의문은 늘 뒤따랐다. 새로운 환경을 저어하는 성격은 아니었는지라 꼬치꼬치 엄마에게 캐묻지는 않았다. 다 크고 나서, 엄마도 마음의 짐을 털어놓을 수 있을 때가 되어 알게 된 사실은 그 대부분이 아빠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사업 실패와 그로 인한 불운, 불화가 얽혀 사람들에게 쫓기거나,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업을 하겠다며 보증금을 빼 가 연락이 두절되는 식이었다. 실제 우리 집에서 벌어졌던 일들이다. 성인이 되어서야 난 그 의문의 퍼즐 조각들을 다 끼워 맞출 수 있었다.


보증금을 빼가 남은 가족들을 허름한 집으로 내모는 이야기. 이 서사가 가족 드라마의 클리셰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서너 집 건너 한집은 겪었을 법한 보편적 경험이기 때문일 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아빠, 가부장은 국가가 나날이 발전하던 시기 야망을 한없이 부풀리며 자라난 소년이었다. 그들은 세상이 통제 가능하다는 환상을 갖고 자란다. 일정 수준의 능력, 부, 권위를 얻고 나면 세상을 내 손아귀 안에 두고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착각이다. 그리고 내 가족을 온전히 내 힘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강렬한 열망을 함께 품는다. 그러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들 안에서 꿈틀거리는 왜곡된 야망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패배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남성성은 폭력 혹은 체념으로 회피해 버린다. 공동체를 지키기보다는 통제하고, 끝내는 파괴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가장 쉽게 통제하고 파괴할 수 있는 대상은 역시나 가족이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가정에만 머물지 않는다. 국가 개념, 정치 체계, 그로 인한 전쟁, 이 사회에 만연한 성공신화. 모두 마찬가지이다. 관리하고 정복하고 설계하고 통제하려는 사고다. 그러나 삶은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통제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예기치 않게 시작되고, 예기치 않게 무너지고, 예기치 않게 상실하는 것. 산다는 건 무언갈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두발을 딛고 밀려오는 고난과 고통을 견뎌내는 일이다. 그리고 고통을 견뎌내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아빠가 쫓던 것이 실체 없는 '숫자와 명예'였다면,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몸'이었다. 나를 먹여 살린 엄마였다. 아빠는 이를 외면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내가 목격한 사실이자 진실이다.


엄마는 전단지를 돌리다 커다란 개에 물려 다리를 다쳤고, 개 주인이 보상한 돈으로 돼지고기를 사 와 우리가 좋아하는 불고기로 저녁상을 차렸다. 생전 해본 적 없는 고등어 껍질을 벗기며 돈을 벌었고, 남의 집 청소를 하러 갔다가 그곳이 아들의 친구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황급히 그만두어야 했던 난처함도 견뎠다. 이불도 팔았다. 친한 친구들에게도 철판을 깔고 보험을 파는 사이사이, 집안일이라는 끝나지 않는 굴레를 묵묵히 돌리며 버텼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노동이, 화려한 수사가 아닌 생활의 근육과 난처함이 우리를 먹여 살렸다.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건 엄마뿐이었다.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로마』의 클레오는 계급과 인종의 교차점에서 살아가는 가정부다. 그녀는 변명하지 않는다. 혁명이라는 거창한 명분에 현혹되어 무술을 연마하는 철없는 애인이 임신 사실을 듣고 도망가버렸을 때에도, 제멋대로인 남편 때문에 독박육아를 하느라 히스테리를 부리는 주인집 사모 앞에서도 묵묵하다. 자신의 삶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클레오는 국가와 개인의 얽히고설킨 운명을 온몸으로 맞선다. 영화는 반복해서 그녀가 직접 경험하는 '몸의 고통'을 비춘다. 노동, 임신, 사산과 상실의 고통까지도. 삶은 고통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이는 처절하다.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차고 넘치는 생명력을 갖는다.


조금씩 빗겨나간 책임과, 누군가의 왜곡된 선택들은 제삼자에게 파도처럼 밀려온다. 거센 파도가 밀려와도 클레오는 굴하지 않는다. 두 다리로 우뚝 써서 파도의 물리력을 한치의 거짓도 없는 그녀의 몸으로 저항하며 나아간다. 그리고 두 아이의 생명을 구해낸다. 살아간다는 건 이런 것이다. 어떤 상황이 나를 가로막을지라도 생명을 위해야 하는 것, 그리고 나의 생이 가진 힘을 기반 삼아, 그에 수반되는 고통을 온전히 견뎌내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 진실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맞서는 것이다.


세상에 전쟁이니 평화니 무역이니 조합이니 정치니 하는 게 무엇 때문에 있는지, 이제야 저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모르실 테지요. 그러니까 늘 불행한 거예요. 그건 말이죠. 가르쳐 드릴게요, 여자가 좋은 아기를 낳기 위해서예요. 『사양』 162p


『사양』의 가즈코는 전후 몰락한 일본의 귀족 집안의 딸이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남은 것은 쇠락한 가문과 병약한 어머니, 그리고 자멸해 가는 동생뿐이다. 몰락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과거의 품위와 계급은 더 이상 삶을 지탱하지 못한다. 남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진다. 허무와 알코올 속으로 침잠하고, 혁명을 말하면서 생활을 책임지지 않는다. 가즈코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유부남의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사회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아이,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할 생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말한다. 전쟁도, 평화도, 정치도, 혁명도 결국은 “좋은 아기를 낳기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여성의 역할을 '아이를 낳는 몸'정도로 한정 짓는 것이 아니다. 전쟁, 혁명, 정치 따위의 행위들이 비겁한 관념적 허세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에서 고통을 견디는 생명들과 연대하기 위함이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몰락을 피할 수 없다면 그 몰락을 자양분 삼아 새로운 생명을 틔우겠다는 것, 가부장이 지배했던 관념의 세계가 허용하지 않는 길을 육체의 의지로 뚫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클레오와 가즈코의 공통점은 거창한 언어에 있지 않다. 그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온전한 몸으로 세계를 통과한다. 하나는 생명을 지켜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잉태한다. 통제하려 하지 않고, 지배하려 하지 않으며, 세계를 설계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밀려오는 것을 온전히 감당한다. 고통을 통과하고, 상실을 통과하고, 책임을 통과한다. 삶은 사상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삶은 몸 위에 세워진다. 몸으로 버티고, 몸으로 견디고, 몸으로 이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혁명의 가장 정확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오해해서는 안된다.『로마』의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복도에 흩어진 개똥을 말없이 물걸레질하는 클레오의 모습을 비춘다. 혁명도, 전쟁도, 이념도 아니다. 그러나 삶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누군가 외면한 것을 몸으로 감당하는 일. 큰 파도든 작은 파도든, 심지어는 왜곡된 가부장제가 저지르고 남은 잔해들까지도 누군가는 치워야 한다. 클레오가 그랬고, 가즈코가 그랬고, 그리고 우리 엄마가 그랬다. 이들은 세계를 지배하려 들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통과해 왔다. 세계는 통제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견뎌냄으로 인해 그나마 살만한 세상이 된다. 혁명은 관념이 아니라 몸에서 시작된다. 세상 많은 여성들이 증명해 온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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