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화되지 못한 말, 말이 되지 못한 말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

by May

어느 철학 교양 강의였을 것이다. 여느 철학 강의처럼 서양 철학사를 계보대로 훑지도 않았고, 특정 상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어만 내면 과제도 시험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학생들에 대한 교수의 수용적인 태도와 자유로운 분위기도 강의의 인기에 한몫을 더했다.


보통날처럼 교수는 학생들에게 특정 상황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날의 주제는 가족이었다. 학생들은 가족에 대해 저마다의 답을 내놓았다. 따뜻함, 기억, 사랑. 대체로 감성적인 단어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교수는 “다 맞는 말이에요, 허허” 하고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단호한 표정으로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가족은 족쇄다. "가족은 족쇄다, 어쩔 수가 없어요." 어쩔 수가 없다. 딱히 가족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부모를 형제를 선택할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채워지는 이 족쇄는 좋았건 나빴건 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조차 그 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가족을 거부했다는 사실 자체가 삶 전반에 하나의 반대항으로 남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 역시 가족이라는 관계가 만들어낸 궤도 위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이다. 사회는 여기에 도덕과 법을 더한다. 가족을 거스르는 이는 몰상식하거나 파렴치한 인간이 되기 쉽다. 가족 관계를 끊는 것조차 수많은 절차와 사회적 낙인을 동반한다. 불행하더라도 원가족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는 말은 반복된다.


그 안온한 족쇄를 과감히 풀어 던진 사람들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 속 주인공들이다. 행복하지만 한없이 불안정한 가족이다. 이들 사이에는 서로를 묶어둘 법적 장치도, 혈연이라는 강제성도 없다. 전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낡은 가옥 한 채를 지킨 채 살아가는 할머니 하츠에, 가출 청소년 아키, 일용직 노동자 오사무와 노부요, 그리고 그들이 구출한 쇼타. 하츠에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가족이 되기 위해 서로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결핍'과 '생존'을 매개로 모인 기묘한 공생 관계다. 그들은 턱없이 부족한 생활을 충당하려 마트에서 도둑질을 한다. 오사무와 쇼타가 도둑질을 하고 집에 돌아오던 어느 날, 둘은 추운 날씨에 떨고 있는 아이 유리를 만난다. 둘은 유리를 구조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집으로 들인다. 그들은 그렇게 가족이 된다.


그러나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절도범이자 유괴범이다. 하츠에가 죽은 뒤에는 그녀의 시신마저 유기해 버린다. 다 사정이 있다. 개인의 사정은 지극히 복잡하다. 그러나 사회는 그 모든 맥락을 하나하나 담아낼 촘촘한 그물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무수한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 사회는 일반화된 기준을 필요로 한다. 그 기준은 가장 보편적인 선에 근거하고, 그 보편을 따라 합리적인 언어로 하나의 논리 체계를 만든다. 법이다. 법 규범은 사회의 존속을 위해 세워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성격 탓에 모든 개인을 살리는 데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들의 삶 또한 외면받는다. 우리는 종종 이상하리만큼 사회의 편에서 개인을 바라본다. 사회의 현상 유지를 위협하는 개인이라면 쉽게 악인 취급해 버리는 것이다.


사회의 판단은 그 개인의 삶이 어떠한가 와는 무관하게, 좋던 나쁘건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지속 가능하다고 자위하며,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방향을 택한다. 논리는 언제나 사회의 편이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됐지." 뭐가 어떻더라도 규범을 어겨서는 안 된다. 여기서 주객이 전도된다. 개인의 삶이 처참히 무너질지라도, 규범을 어겨서는 안 될까? 논리의 언어는 개인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다. 이유는 너무 쉽게 설명해 버렸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을 하나하나 이해하려 들기 시작하면 판단은 끝없이 복잡해진다. 사회는 그런 복잡함을 감당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을 동시에 다루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단순한 기준이 필요하다.


린(유리)까지 도둑질에 가담하는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쇼타는 일부러 눈길을 끌어 경찰에 붙잡힌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기에 상황을 막아야 했지만 오늘의 가족들을 사랑했기에 완전히 배신할 수도 없어 내린 선택이다. 완전히 도망치지도 않고, 완전히 고발하지도 않는 방식을 택한다. 경찰의 수사는 자연히 오사무와 노부요에게도 이어진다. 법의 언어 앞에서 그들은 맥락을 설명하려 애쓴다. 유괴가 중범죄인 건 알겠는데, 우리는 누군가 버린 걸 주웠을 뿐이라고, 학대를 당하는 아이를 외면할 수 없었고 가르칠 수 있었던 건 도둑질뿐이었다고 항변한다. 논리의 차원에서 보자면 불리해질 수밖엔 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내뱉는 말들은 모두 진실이다.


법, 그리고 도덕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는 기준이다. 상황을 정리하고 판단을 끝내는 언어다. 윤리는 다르다. 윤리는 판단을 끝까지 유보하게 만든다. 문방구의 할아버지가 쇼타의 도둑질을 알고도 모른 체 했던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선택이 왜 가능했는지를 묻게 한다. 한 개인의 무수한 가능성들을 셈하는 일이다. 그래서 윤리는 우리를 곤란하게 만든다. 사실 인간다움은 그 곤란함의 바운더리에서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곤란함 탓에 보통은 이를 저버린다. 그 삶의 맥락을 끝까지 따라가 볼 여지를 소거해 버리는 것이다.


사회는 결국 그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법의 언어로 보면 그것은 올바른 결말이다. 아이는 친부모에게 돌아가고, 소년은 시설에서 보호받으며 학교에 다니게 된다. 범죄를 저지른 어른들은 처벌을 받는다. 사회는 그렇게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한다. 족쇄를 벗어던지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쇼타는 시설 버스를 타고 오사무를 남겨둔 채 떠난다. 창밖에 서 있는 오사무를 바라보며 쇼타는 입을 움직인다. “아빠.” 그러나 그 말은 끝내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이다. 사회의 논리로 보자면 '말이 되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짜 말이 되지 않는 건 무엇일까. 함께 살아온 시간인가, 아니면 그것을 가족이라 부르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의 기준인가. 린은 다시 현관 앞 울타리 사이의 좁은 틈으로 세상을 내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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