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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림 Jan 19. 2019

20.소박한 것의 힘

나뭇잎 메모

ⓒmaywood

2018년 4월 후배와 함께 목탄화가 허윤희의 '마음 채집실'이라는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런데 목탄화 전시가 아닌, A4 크기의 종이에 매일 그린 나뭇잎들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2008년부터 집 근처 산책을 다녀올 때면 나뭇잎들을 하나씩 주워와서 그림을 그리고 그날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햇수로 벌써 10여 년째 매일 이 일상의 리추얼을 꾸준히 하고 있는 셈이다. 


전시회에 가서 그동안 그려온 나뭇잎들 중 380여 편을 골라 <나뭇잎 일기>라는 책으로도 펴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목탄화는 스케일이 크고 매우 강렬한 느낌을 주는데, '나뭇잎 드로잉'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작업이었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서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이 동시에 보일 수 있는지 놀라웠다. 


나뭇잎 작품들에는 자연의 사계가 담겨 있었다. 마냥 싱그러운 초록잎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엄지손톱만한 새싹에서부터 드로잉지에 미처 다 담지 못할 만큼 커다란 이파리도 있었으며,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면서 갈색으로 변하는가 하면, 벌레가 잠시 머물며 갉아먹은 자국이 있는 나뭇잎들도 있었다. 


당시 '데일리 키친 아트' 작업을 막 시작했던 나는, 그 수많은 나뭇잎 그림숲을 거닐며, 긴 호흡으로 멀리 보고 가면서 쉽사리 지치거나 좌절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격려를 해주었었다. 해가 바뀌어 조금 있으면 이 작업을 한 지도 꽉 찬 1년이 되어간다. 그 사이 냉장고와 부엌 서랍장에는 언제든 서로 연결지어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재료들이 차곡차곡 쌓여왔다. 


나도 내가 어떤 작업을 할지 예측하기가 참 어려워서, 초반에는 그저 막막하다는 푸념을 곧잘 하곤 했다. 그러나 살짝 달리 생각해보았다. 내 앞에 수많은 가능성들이 놓여 있는 것으로. 내일 출근하기 위해 잠을 청할 때 그 내일이 뻔한 시간들이 되겠지 싶다가도, 내 앞에 놓여 있는 시간들의 잠재력을 믿자고 혼자말을 할 때처럼. 


10년 뒤의 나와 내 작업들은 어디를 향해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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