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껍데기와 열매와 집
견디는 것에 대하여 ep.06
뜨거운 물에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나왔다.
두툼한 잠옷을 입고 따스한 온풍기 바람을 쐬니 온종일 현장에서 떨었던 추위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한파 속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이틀 동안 열 두 곳에 달하는 태안의 관광스팟을 모두 돌아야 하는 답사일정을 막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이틀 동안 열 두 곳이라니. 아니, 정확히는 이틀도 채 되지 않았다. 동절기 운영으로 일찍 문을 닫는 곳들도 많았고, 태안까지의 이동시간을 포함하면 빠듯하게 하루 반 정도의 시간이 겨우 나오니, 새벽부터 시작해도 답사를 마치기가 쉽지 않았다.
신두리 해안사구, 천리포 수목원, 꽃지 해수욕장, 만리포 해수욕장, 청산 수목원…. 처음 여섯 군데에서 시작한 촬영 스팟은 딱 그 두 배가 되어서야 겨우 픽스될 수 있었다. 도무지 승패가 나지 않는 끝말잇기를 하듯 담당 주무관과의 지난하고도 피곤했던 미팅 일정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풀고 나니, 이내 긴장이 풀렸는지 온몸이 얼음장 같은 바닷바람에 두드려 맞은 듯 슬금슬금 아파왔다. 별로 먹은 것도 없는 속까지 말썽이었다. 함께 답사를 간 촬영감독의 운전습관은 연신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탓에 이틀간 내가 먹었던 음식들이 도로의 지형에 따라 순번을 바꿔가며 골고루 다 올라올 것 같은 위기감을 매번 느껴야 했다. (다행히도 목구멍을 넘어 음식이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적막을 깨기 위해 켜놓은 티비에서는 사람들이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세로로 배치된 직사각형의 테이블 가운데에 진행자가 앉아있었고, 양옆으로 두 명의 패널들이 마주 앉은 모습이었다. 장소는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고층의 레스토랑인 듯했는데, 중간중간 적절하게 배치된 따스한 색감의 고급스러운 조명 덕분에 연말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어 보였다. 부드러운 조명 아래로 자막이 떠올랐다.
'사회적 약자에게 너무 각박한 우리나라'
'땅이나 집이 없는 사람들이 살기엔 너무 힘든'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모든 문제를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는 데 동의하지 않아요. 사회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거기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또 사회적 해결이 어렵죠. 진짜 진실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해요."
오른쪽에 앉은 각진 네모 모양 프레임의 안경을 낀 한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말은 시종일관 까다로운 블록을 착착 맞춰나가듯 규칙적이고, 논리적이었는데 이야기의 마무리가 참으로 뜻밖이었다.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중간 그 어디쯤에 있을 거라니. 논리로 무장한 빈틈없는 변론가에게서 순간, 쌀 한 톨 만한 허점을 발견한 것 같아 묘한 희열감이 들었다.
"우리가 서로를 덜 괴롭히는 방향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할 거고, 동시에 그건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해법도 강구해야 하고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원론적인 질문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여기서 서로란 집이 있는 사람과 집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걸까. 그렇다면 집이 없는 집 바깥의 사람들이 집이라는 울타리 안의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것은 애초부터 합리적인 가정인 걸까. 집이 있는 사람들과 집이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서로에게 과연 집의 의미란 무엇일까.
꽤 오래전, 다큐멘터리에서 남반구 어딘가에 살고 있는 바우어라는 새를 본 적이 있다. 보통의 수컷이 화려한 색과 깃털을 가진 것에 비해 그 새는 털의 빛깔과 모양이 아주 수수했다. 수수한 그 새는 티비 속에서 꽃잎을 물고 있었다. 꽃잎을 차례로 초록 이끼부터 나뭇가지, 나뭇잎, 크고 작은 열매들을 부지런히 둥지로 물어다 날랐다. 몸을 요리조리 비틀어 둥지 빈 곳 깊숙이 물어온 나뭇가지를 집어넣기도 하고, 거꾸로 매달려 둥지를 다듬으며 아치형의 집을 차근차근 만들어나갔다.
완성된 둥지는 작은 초가집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는 붉고 푸른 열매와 꽃, 하얀 조개껍데기가 아름답게 놓여있었다. 새하얀 드레스 자락을 찬찬히 끌며 신부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걸어들어올 것 같은 순수한 원형의 아름다움이 담긴 공간이었다. 수컷 새가 아주 오랜 기간 사랑과 정성을 모두 쏟아부은 결과물이었다.
집안을 천천히 비추는 동안 내레이션은 바우어 새가 1년 중 3개월의 털갈이 기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을 짓는 데 에너지와 시간을 쏟는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1년 열두 달의 시간 중 무려 9개월, 약 8할의 시간을 집 짓는 일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세 번의 계절을 거치며 지어낸 단단하고 포근한 집은 경이롭고도 아름다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지어진 많은 집들은 순수한 원형의 아름다움을 잃은 지 이미 오래이고, 집이라는 공간에 그런 무형의 진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슬프게도 조개껍데기와 꽃잎, 나뭇가지로는 집을 지을 수가 없다. 세 번의 계절을 나는 동안 어떤 이들은 여러 채의 집을 짓고, 부수고 또다시 짓기도 할테지만, 어떤 이들은 서른 번의 계절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무수한 계절을 지나더라도 단 한 채의 집조차 가지지 못할 것이다.
나는 몇 번의 계절을 지나야 집을 가질 수 있을까? 휴식과 재정비를 위한 베이스캠프가 아니라, 더 이상 다음 목적지를 찾아 외롭고 위험한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되는 집이라는 공간이 간절해지는 요즘이다. 항상 머물 수 있고, 계속해서 익숙해지고, 원할 때까지 안주할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한다.
나는 목적지를 모르지만,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다. 어딘가에.
그곳을 찾을 때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조개껍데기와 열매, 꽃잎들을 그러모으는 삶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