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하지 못한 인간
견디는 것에 대하여 ep.07
대표님, 지금 연봉의 20%를 올려주세요.
그리고 제게 기획팀 팀장직을 맡기셨으면 합니다.
지난 1년 동안 성과는 충분히 있었고,
대표님께서도 그 부분은 인정해 주실 거라 생각해요.
나는 준비했던 말들을 담담히 쏟아놓고, 두 손을 깍지 끼어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지난 1년간 무언가 해결해야 하는 골치 아픈 상황이 닥칠 때마다 나를 향해 굴러오는 눈동자들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도맡아 해결하며 무수히 생각했던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또 그리 대단할 것은 없었다. 20%를 인상해 봤자 내 연봉은 30대 중반의 평균 연봉에도 미치지 못했고, 팀장직이라고 해봤자 고작 열댓 명 정도의 팀원들을 이끄는 것뿐이었으니까.
"음···."
대표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피가 작고 가벼워 한 손으로 다루기에 충분하지만, 그래서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이 공을 대표에게 던져놓은 현시점에서 나는 별로 고민할 것이 없었다. 연봉인상과 승진을 내 입으로 또박또박 말하기까지 이 시나리오는 이미 수도 없이 고민해 왔으니까.
지금 대표와 나 사이에서 통통 튀고 있는 이 공이, 우리 둘 다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넘어가버렸을 때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퇴사의 흐름을 탈 것이었다.
그간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들을 쳐내다 보니, 문득 일을 잘 가르고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직급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무도 돕지 않아서 나 혼자 밤샘 작업을 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서 나 혼자 해결했다. 당연했다. 내 성격에 밤을 새 가며 혼자 해냈으면 해냈지 팀원들에게 결코 도움을 요청할 성격이 못 되었고, 팀원들 역시 다들 속으로는 '야근수당도 없는데 굳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
어떤 날에는 촬영과 편집을 담당하는 7개월 차 피디가 나를 따로 불러내서 노골적으로 물어왔다. 그는 사회 초년생이라 얼굴에 아직 어린 티가 묻어났지만, 그에 맞지 않게 눈매가 깊고 서늘했다. 그래서 연차가 꽤 있는 피디들도 Y를 편하게 대하지 못했고, 군대식 조직문화에 익숙한 피디들은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Y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니다 싶으면, 참지 않고 뭐든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되물었고, 확인했고, 확실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Y에 대한 평판은 초봄의 기온 그래프처럼 오르락내리락 변동차가 컸다. 누군가는 소신을 꺾지 않는 당당함이 좋다 했고, 또 누군가는 너무 건방져서 조만간 사고를 칠 것 같다고도 했다. 들어보면 둘 다 맞는 말이었다. 나 역시 때로는 Y의 당당함이 좋았고, 또 때로는 사회가 분명하게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선을 아슬아슬 넘을 것만 같아 불안하기도 했으니까.
"이런 질문 무례할지 모르지만, 혹시 대표님께 따로 뭐 받는 거 있으세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Y가 깊고 서늘한 눈매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어왔다. 나 역시 그 눈을 똑바로 아주 깊게 들여다보며 되물었다. 그런 내 시선에 나도 모르게 날이 서 있었는지 Y가 묻지도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말은 못 했지만, 다들 궁금해하더라구요. 사실 좀 불편해하기도 하고요. 야근수당도 인센티브도 없는 회사에서 왜 굳이 거의 매일 야근을 하면서까지 일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나는 잠시 머리가 띵했다. 방금 내가 들은 이 말을 나의 언어로 해석하기까지 버벅버벅- 얼마간의 버퍼링이 걸렸다. 짧은 순간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는데, 우선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딱 세 가지였다. 당황스러움과 불쾌함. 그리고 바로 지금이 아슬아슬하게 타오던 선을 Y가 넘어왔다는 것.
일하는 데 이유가 있나요? 먹고살려고 하는 거죠.
그리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니까 책임지는 거고요.
Y씨 말대로 여긴 중소 중에 중소 아닌가요?
인센티브도 수당도 없다는 건 본인이 이미 더 잘 알고 있잖아요.
대표는 연신 레모네이드를 홀짝 거렸고, 나는 줄지 않는 투명한 유리잔을 바라봤다.
"작가님이 그동안 작가 이상의 업무를 했다는 건 잘 알지만, 연봉 20% 인상에 승진까지는 무리예요.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존 직원들이 느낄 박탈감도 생각해야 해서···."
생각지 못한 대답도 아니었다. 오늘이 17일이니, 이달 말까지 결정해서 알려달라 말하고 퇴사의사도 함께 전했다. 그리고 일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대표님, 제가 팀장직을 달라고 말씀드린 건 자리에 욕심이 있어서도 아니고, 팀장직이 좋아 보여서도 아닙니다. 제가 맡고 있는 일의 범주는 이미 오래전에 팀장급과 동일한 상태예요. 직급에 맞는 직무를 주시든, 직무에 맞는 직급을 주세요. 그게 제가 대표님께 진짜 말씀드리고 싶은 핵심입니다."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일어섰다. 대표가 내 말을 믿을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진심이었다. 지난 1년간 이곳에서 일하면서 이 작은 조직 안에서도 얄팍한 권력의 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치사했다.
회사는 일을 위해 모인 조직이지만,
정작 일의 균형이 고르게 나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독박을 쓰지 않기 위해서는 위로 올라가
일을 분배하는 위치에 서거나,
아니면 조용히 내 몫만 해내는 쪽을 택해야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 두 부류에 속하지 못했고,
어쩌면 조직생활의 크고 작은 불합리함을
모른 척 넘기지 못하는 쪽에 가까웠다.
'일하는 데 일만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 자신을 나는 이제야 후회하고 있었다.
일하는 데서 정말 일만 잘하면, 내내 밭만 갈다가 후년에는 관절염에 시달리는 소가 될 뿐이었다. 적당히 꾀를 피워가며 주인 애를 태워야 간식도 챙겨 먹고, 더울 땐 쉬어가며 밭 가는 흉내만 내도 칭찬이 쏟아진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제, 공은 던져졌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한 건 하나다.
더는 관절염에 시달리는 소로 남고 싶지 않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