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아
드라마 <안나>를 재미있게 보고 원작 소설이 있다는 말에 찾아 읽게 된 <친밀한 이방인>
원작에는 드라마 주인공인 '안나' 외에 소설가이자 화자인 '나'와 '나'에게 '안나'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진'이 추가로 등장하고, 오히려 이 둘의 이야기가 주가 되는지라 드라마와 비슷하면서도 달라 더 재밌게 읽었다. 얼마나 덜어내고 어디에 집중하느냐가 각색의 매력이구나 생각했다.
- 왜냐하면 나는 아이를 낳아 키워야 했기 때문에. 그 모든 과정이 내게는 수백 개의 허들 같았다. 하나하나에 걸려 넘어지고, 절망하고, 회복하고, 다시 또 넘어지고, 망가지고, 바로 서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물론 이건 변명이 아니다. 어떤 여자도 아이를 낳아 키운 것을 경력 삼을 수는 없다.
- 그것은 나 자신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질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나를 끌고 다녔던 그 일에서 더이상 흥미를 느낄 수 없었고, 그러자 내게 남은 것은 세상 아무것에나 심드렁한, 푹 퍼진 삼십대의 여자뿐이었다. 그 여자는 한때 자신에게 있었던 생기와 아름다움을 남편과 아이에게 빼앗겼다고 믿으며, 그들을 남몰래 증오했다. 그러면서도 그들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그 여자의 이름이고, 집이고,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 여자는 삶이 이미 자기를 스쳐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
- 아랫배에 새겨진 지렁이 모양의 흉터, 몸에서 아이를 꺼낸 그 자국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거울 속에서 꿈틀거렸다. 나는 눈을 피했고, 서둘러 몸을 닦은 후 커다란 티셔츠를 입었다.
- 결국 딸애는 나를 앞서갈 것이고, 지금처럼 그애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이 나의 인생이 될 것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그랬듯이, 그애는 곧 나에 대해 잊을 것이다.
표시해 둔 문장들을 다시 살펴보니 모두 결혼과 출산으로 자신을 잃어버린 '나'의 구절들. 분명 행복한데 동시에 조금은 공허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