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학원 영어강사로 살아남기 21
숙제가 뭐긴 이놈들아, 지난 시간에 알려줬잖아.
입술 끝에 걸려 나올락 말락 한 말을 삼킨다. 나는 학생들에게 어지간해서는 화내지 않는다. 딱히 화도 안 난다. 화나는 건 겨울의 난방 비용, 치과비용, 임금체불, 부족한 복지 뭐 이런 거에 화가 난다. 아이들한테는 그냥 속으로 한번 삼키고 말해줄 수 있다. 자, 다음부터 숙제는 잘 써서 가세요. 인간의 완벽함을 믿지 않는 나에게 아직 인간화되고 있는 초중고 학생들이 숙제를 못 챙기는 것 정도야 참을 만한 일이다. 몇 번이고 다시 이야기해줄 수 있다. 인간은 결국 반복에 물들게 되어 있다.
하지만, 주 3회 수업에 숙제를 3번 다 물어보는 행동을 두 달째 반복하고 있는 건 정말이지 좀 문제가 있다.
' 선생님 그래서 리딩 숙제가 뭐였죠? '
이번에 입학한 중1, 신규 남학생은 어딘가 부산스러운 타입이다. 학력이 부족하다고 하기엔 문제를 풀어보면 곧잘 답을 찾는다. 하지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시선의 이동이 너무 빠르고 한 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너무 짧다.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수업시간 중간에 손을 들고 본인이 묻고 싶은걸 묻는다. 전형적인 주의력 결핍 현상이다.
패키지 상품으로는
"선생님 숙제가 뭐예요?"
"선생님, 프린트 안 가져왔요"
"선생님 숙제 한 페이지 못했어요"
"숙제인지 몰랐어요"
"숙제했는데 집에 책을 두고 왔어요" 등등이 있다.
H는 숙제를 한 달째 놓치고 있다. 페이지를 접어줘도, 맨 앞장에 적어가도, 메시지를 보내줘도 모두 다 어딨는지 못 찾고 수업 당일 또는 수업 몇 시간 전에 연락을 한다. " 선생님 숙제가 뭐예요? "
사실 선생님들은 딱 보면 안다. 수업시간에 딴짓하고 졸고 휴대폰 만지고 하는 거 선생님들은 다 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모르는 척해주는 것뿐이다. 산만한 학생도 마찬가지다. 잠깐 수업해봐도 알 수 있다. 그 수업을 들어갔다 온 선생님들이 모두 다 같은 이야기를 했으니 말 다했다. 좀 걱정이다 라는 말로 돌려 표현했지만 학부모에게 알릴 재간은 없다. 상담 때 들어보니 본인 아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타입이신 것 같다. 학교에서도 진로나 상담 시간에 담임선생님이 한 이야기에도 불같이 화내는 보호자가 많다던데 학원 선생님이 하는 말이야, 뭐 기분 안상 하고 퇴원 안 하면 다행이다. 학원강사로서 학부모님들께 하고 싶은 말 딱 한 가지를 고르라면 이렇게 물을 거다. " 본인 아이 정확히 알고 계신가요? "
그런 고차원적인 상담과 질문은 지금 필요하지도 않다. 오늘 수업을 위해 3시간 전 연락 온 학생에게 숙제를 알려주면서 한번 더 이야기한다.
'H야, 숙제는 앞으로 헷갈리지 않게 정확하게 표시해가서 해와. '
'네, 당연하죠 쌤. '
대답은 100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