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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쌤 Oct 10. 2021

끝나고 다른 학원 가야 해요

동네 학원 영어강사로 살아남기 32

K-고등학생으로 사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세상 살이 쉬운 일 어디 있겠냐만 그중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힘든 이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을 제한한 상태로 버텨야 하기 때문에 힘들다. 그냥 공부가 힘들어요하는 징징 거리는 소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T는 토요일 1시까지 수업에 와야 하는 고1이다. 수업 날 오전 11시쯤 문자가 왔다.


[ 선생님 저 오늘 수학학원 좀 늦게 마칠 것 같아요 ]

[ 알겠어 마치고 바로 와 ]


지각을 하면 한다, 안 오면 안 온다 말해주기를 약속으로 정하고부터는 꼬박 문자를 보내주는 착한 학생이다. 수학 성적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것도 알고 있어서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헐레벌떡 들어온 T는 2시가 가까워져서야 영어학원에 도착했다. 잠깐 앉아서 숨을 돌리고 바로 오늘 할 일을 시작한다. 신경이 쓰여서 물어봤더니 오늘 스케줄은 말 그대로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영어 끝나고 그럼 집에 가서 밥 먹을 수 있냐고 물으니까 영어 마치면 수학학원 다시 가야 한단다. 언제 마치냐고 물어봤다.  


"저도 몰라요"


T의 토요일 스케줄

오전 9시~2시 수학학원

2시~ 3시 30분 영어학원

3시 30분 ~??? 수학학원



사람은 배가 고프면 집중을 못한다. 배가 너무 불러도 집중을 못한다. 학생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은 그런 동물이다. 적절히 먹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저 스케줄은 좀 아니지 않나? 안타까운 마음에 과자를 가져다 손에 쥐어준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너무 많이 티 내서는 안된다. 그럼 수학만 중요하고 영어는 2순위로 미뤄 버리기 때문에 숙제를 안 해온다. 그것도 안될 일이다. 학생들과의 밀당은 언제나 적절하게 해야 한다.  학원강사는 알고 보면 연기에 능해야 하는 직업이다.






오늘따라 P가 조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다. 평일 저녁 수업이라 학교 갔다 와서 피곤할 법 하긴 하지만 원래 이런 학생이 아니라 걱정이 슬쩍 올라온다.


"P야, 어제 잠 못 잤니? 물 한잔 마시고 올래?"

"선생님 죄송해요 세수 좀 하고 와도 될까요?"


세수도 하고, 물도 마시고, 복도도 한 바퀴 돌고 오라는 말에 배시시 웃으며 나가는 P의 뒤통수가 졸음으로 만연하다. 돌아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행평가 폭탄이란다. 잠을 못 자고 학교를 갔는데 오늘따라 학교에서도 졸 수가 없어서 학원에서는 당연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침 6시 기상

아침 7시 등교

야자 없는 날 5시 하교

오후 7시까지 집 가서 저녁 먹고 수행평가 하나 완성

오후 8시 영어 학원 (또는 수학학원)

오후 11시 영어학원 마치고 집

~2시 까지 수행평가


대충 들어보니 P의 최근 스케줄은  대략 이러했다. 하루에 4시간 자고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공부하거나 공부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으로 보낸다. 안 피곤 한 게 이상하다. 나도 저런 스케줄로 3년을 살았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싶기도 하고 10년이나 지났는데 왜 변한 게 없지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다. 나도 버텼으니 너도 버텨. 다른 애들도 버티고 있으니 너도 버텨내야 해 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생각했다가도 원하는 성적을 만들지 못해서 원하는 학교에 못 가는 것도 잔인하다는 생각으로 다시 학생들을 도닥인다.


번외.


L은 초등학교 5학년이다. 최근 친구들이랑 약속잡기에 한창 빠졌는데 그래도 기특하게 숙제를 꼬박 해온다. 지난주 금요일 L이 몸이 안 좋아서 결석했다. 주말 쉬고 영어 숙제가 있는지 궁금하다고 문자가 왔다.


[ 선생님 저 L인데요 그래머 숙제가 뭐예요??  ]

[ 안녕 L, 우리 지난주에 새 단원 시작해서 숙제는 설명 한번 더 듣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냥 오세요~]

[ 오예!!!!!!!!! 내일 학교 끝나고 칭구들이랑 놀기로 했었는데용 숙제 있을까 봐 조마조마 했어용 ㅎㅎ 내일 봐요 선생님]


숙제가 있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것과 반대로 없다고 하자 마자부터 이모티콘에 오예까지 다 날아온다. 친구들과 놀기로 했는데 숙제가 있으면 못 놀까 봐 마음 졸였나 보다


나는 숙제를 거의 매일 내는 편이라 숙제가 없는 경우는 잘 없지만 새로운 단원의 경우에는 같이 수업을 한 번 더 하고 숙제를 내준다. 배우지 않은 내용 혹은 배운 내용보다 어려운 내용을 숙제로 내는 것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숙제에 겁을 먹는 순간 '너무 어려워서 혼자서는 못하겠다' 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날아오는 이모티콘이 귀여워서 슬쩍 한번 더 물어본다


[ 그럼 다른 숙제는 없어? ]

[ 아뇨 다른 숙제 많아요!!!! ]


영어 숙제가 없다고 다른 숙제가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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