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후기 2
9와 숫자들의 라이브를 직접 듣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올해 1월 3집 <수렴과 발산>을 발매한 기념으로 전국투어를 했을 때 한 번 가서 들은 적이 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당시에 여러 가지 다른 음악들에 빠져 3집을 그리 많이 듣지 않았고, 결국엔 노래와 제목이 매치가 안 되는 상황에 처한 채로 공연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연주 자체는 최상의 컨디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감흥은 얻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들을 흘려보내던 와중 2가지의 사소한 일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는데, 하나는 9와 숫자들이 4월에 공연을 한다는 소식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드디어 3집을 제대로 들어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3월이 갈수록 휴학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자꾸만 나를 위로할 만한 것들을 찾아냈는데, 그렇게 돌려 듣게 된 몇 개의 음반 중에는 <수렴과 발산>도 들어있던 것이다. 그래서 단박에 공연을 보러 가야겠다는 의지는 불탔으나 아쉽게도 티켓팅은 끝난 지 오래고 매진 역시 오래전에 완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래 취소표로 근근이 공연을 즐겼던 나는 굴하지 않고 네이버 티켓을 뒤져 티켓을 얻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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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의 이름은 대략 '디스코그래피'이다. 1월에 있었던 공연에서도 이제는 한 회의 공연에서 노래를 다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곡들이 많이 나와 아쉽다는 말을 했던 것 같았는데 그 아쉬움을 이런 식의 혜자로 풀어낼 줄은 몰랐다. 공연은 총 4회 차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회차 당 두 장의 앨범을 통으로 연주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면 1회 차에서는 1집 <9와 숫자들>와 <유예>에 수록된 전곡을 연주하는 식이다. 공연은 막공이 진리라는 공식을 위해 4회 차를 예매할까 고민하다 결국엔 1회 차를 예매했다. 1월 공연에서도 3집은 들어본 적이 있었고 아무래도 나는 9와 숫자들의 초기곡들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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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와 숫자들의 1집과 <유예> 앨범은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2015년의 기억을 꺼낼 필요가 있는데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였던 나는 집을 떠나왔다는 안도감과 미친 듯이 돌아가는 학과 생활, 술과 해장술의 무한 루트, 영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간관계 등에 열심히 등 떠밀리며 살게 된다. 그러니까 대학에 들어왔다는 상승감이 이미 푹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말하기 곤란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역시 자꾸만 나를 위로해줄 것을 찾게 된다. 아무래도 그런 상황일 때 내가 쉽게 접근하는 것이 소설이나 음악인데 아쉽게도 그 당시 나는 지니 100회 다운로드권도, 콘서트를 갈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중학생 때처럼 시디를 듣기로 결심했다. 휴대용 시디플레이어와 시디가 필요했고(애석하게도 나는 대학에 오면서 그 간의 나에 대한 잔재를 없애려고 했기 때문에 옷 몇 개 빼고 아무것도 안 챙겨 온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참 여러모로 안타까운 친구다) 시디가 배송되는 시간조차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에 온 뒤로 처음 먼 길을 떠나게 된다. 학교가 꽤 시골에 있어서 시내에 나가려면 40분 정도 버스를 타야 했는데 그때의 기분은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처음 가는 길이니까 조금 불안해하면서 무슨 시디를 사야 하나 고민했던 것 같다. 장고 끝에 라디오에서 몇 번 들어봤던 9와 숫자들의 앨범을 사기로 한다.
뭐 사실 그 날은 딱히 좋은 날은 아니었다. 시디는 인터넷 가격보다 1.2배 정도 비쌌고 시디플레이어를 사러 갔다가는 사기를 당할 뻔했으니까. 하지만 기숙사 방에 들어와서 <유예>를 듣던 순간의 느낌만은 분명히 기억이 난다. 그 날의 피로가 거의 없어질 정도의 따뜻한 느낌을 받았고 아마 그 날 처음으로 타인에게 나의 고통을 덜어놔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후로도 열심히 건전지를 갈아 끼워가면서 혹은 80년대 대학생인 줄 알았다는 농담을 들어먹으며 나는 열심히 시디를 틀었다. 그러던 중 5월이었나 동아리 선배들... 그러니까 09,08학번쯤 되는 졸업생들과 술을 먹을 일이 있었다. 다소 복고의 느낌을 풍기는 그 동아리 특성상 야외에서 돗자리를 펴놓고 고기를 구워 먹었고 벌레에게 물리고 취해서 아스팔트 바닥을 맨발로 밟으면서도 그저 즐거웠던 기억뿐이다. 누가 나에게 지금 즐겁냐고 물어봤고 나는 아마 여기에 있어서 행복하다고 대답했었다. 그런 날도 있었다. 여하튼 한 새벽 2시쯤 되니까 취할 사람은 취하고 어떤 선배는 카오디오로 노래를 틀었다. 그때 들었던 노래가 바로 <9와 숫자들>의 오렌지 카운티였다. 나는 그걸 따라 불렀고 그걸 본 선배는 나와 빠르게 친해지기에 이른다. 나이 차이도 엄청나고 여러모로 접점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그 날 이후로는 그 선배가 거의 날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렌지 카운티의 고마움을 몸소 깨달을 수 있던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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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이 너무 길었는데 하튼간 본격적으로 공연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공연은 홍대 스텀프에서 있었다. 길치인 나는 찾느라 애 좀 먹었는데 일단 홍대 걷고 싶은 거리 근처에 있고 건물 앞에 위베어베어스 모형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다음엔 쉽게 찾아가야겠다. 공연장 규모는 약간 작은 편(벨로주보다 약간 작은 듯)이라서 어디에 앉아도 가수가 크게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명도 아주 밝거나 화려하지 않아서 소극장의 이미지에 잘 맞는 공연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소극장 치고는 음량이 큰 편이었다.
표를 받으면서 급하게 산 데모 테이프와 3집 시디. 데모 테이프는 한정 판매이고 시디는... 미리 못 사둔 게 아쉬울 따름이다. 테이프 모으는 것도 참 좋아한다. 시디와는 또 다른 느낌임에 분명하다.
공연 전 15분가량의 딜레이가 있었다. 유난히 늦게 들어오는 관객이 많은 공연이었는데 아마 오후 2시 공연이라 그랬던 것 같다. 홍대는 타지에서 찾아오기엔 역시 먼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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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공연과 비교했을 때 연주 스타일이 약간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1집과 유예는 많이 연주해오다 보니 변주가 자유롭고 많이 들어가는 느낌인데 1월에 들었던 3집은 더 스탠다드한 느낌. 개인적으로는 둘 다 좋았다. 특히 1집은 시디로만 들었을 때는 좀 정제된 느낌이 있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그렇게 어깨춤이 절로 나올 수가 없었다. 노래의 분위기와 상관없이 시종일관 신이 났는데 아무래도 라이브로 듣기 힘든 노래들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나를 흥분하게 했던 것 같다. 원래 1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역시 오렌지 카운티였는데 삼청동에서가 실제로 들으니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었다. 가사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어 그리 많이 듣지는 않았던 곡인데 라이브를 떠올리며 종종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1집의 마지막 곡인 낮은 침대 역시 명곡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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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공연을 하면 중간중간 멘트를 하는 것이 정석인데 이번 공연은 그렇지 않았다. 곡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스크린에 피피티처럼 띄워 설명했는데 자존심 상하게 웃음이 나도록 설명을 잘 써놓았다. 누가 썼는지 정말 모르겠다! 중간에는 질문을 받는 시간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질문이 많이 나와서 즐거웠다. 질문에 대한 것은 아래에 서술하도록 해야겠다. 보컬 9가 들고 있는 저것은 엘피판인데 내후년쯤에 나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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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과 <유예> 사이에 만우절 이벤트가 있었다. 뜬금없이 3이 베이스를 집더니 9가 드럼을 치고 0이 피아노에 앉더니 4가 기타를 치고 건반을 쳐주시는 분이 마이크를 잡는 것이 아닌가. 부른 곡은 그대만 보였네였다. 건반 세션 분이 부끄러워하셔서 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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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를 라이브로 들으면서는 약간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유예>에는 유난히 슬픈 노래들이 많은데 면면을 살펴보자면 제목부터 눈물이 나는 눈물바람, 타블로가 라디오에서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곡'이라며 틀었던 유예, 어른이 되어선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을 거라는 아카시아꽃, 기 드 모파상의 '진주 목걸이'를 배경으로 만들었다는 착한 거짓말들, 9와 숫자들식 슬픔의 결정체와도 같은 플라타너스까지 다양한 곡들이 각각의 患을 노래하고 있다. 1집의 신남과 약간 다른 결로 연주했다는 기분이다. 음색이 단정했고 좀 더 섬세했는데 이건 내가 더 집중해서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음정 하나하나를 골라내며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원래 아카시아꽃을 들으면 가끔 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눈물이 비친 건 처음이었다.
유예는 만들 당시에는 정말 슬픈 의미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삶이 곧 유예이고, 그게 곧 꿈이고 희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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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곡은 빙글 빙글이었다. 왠지 신나는 곡으로 끝내야 할 것 같고 앨범 수록곡은 앵콜곡으로 하기 부적합할 것 같아서 산타클로스 아니면 빙글 빙글을 예상했는데 정확했다. 기회가 된다면 빙글 앨범도 라이브로 전부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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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에 대한 리뷰는 이쯤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왠지 공연 이야기보다 내 썰이 더 비대해진 느낌이지만 애써 모른척해야지. 9와 숫자들은 서서히 좋아지는 매력이 있다. 세 번째로 공연을 보게 되는 날이 있다면 그때부터는 아마 덕질을 하지 않을까 싶다. 앨범 전곡을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는데 2시간 반의 공연 시간 내내 너무나 행복했다. 2015년의 갓 대학생이 된 어리바리한 나에게, 혹은 모든 것이 즐거움뿐이었던 짧은 그해 5월의 나에게 이 공연을 선물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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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질문 타임에 나왔던 질문에 대한 기록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인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 말해주세요가 ost로 쓰였는데 누군가 그 계기에 대해 물어봤다. 감독과는 원래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여차 저차 해서 감독이 1집을 들어보게 되었고, 처음에는 안 쓸 계획이었다가 뜬금없이 말해주세요에 꽂혀서 쓰게 되었다고. 9와 숫자들을 좋아할 만한 사람이라면 왠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도 아름답게 보일 것 같으니 추천하는 바이다.
다른 질문은 앨범 재킷의 디자인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유명한 디자이너와 오랜 협의 끝에 나오는 작품들이라고 한다. 실제로 9와 숫자들의 앨범 재킷은 충동구매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각인효과까지 있는 걸로 유명하다. 나도 고1 땐가 잡지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봤던 <유예>의 재킷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