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후기 1
만일 내가 국악이나 무용과 관련이 있는 공연을 예매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필시 한예리 때문일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 '최악의 하루'를 본 이후로 나는 그의 영화를 하나하나 찾아보며 학기를 버틸 수 있었고, 그래서 결국엔 팬카페에도 가입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은 단연 한예리라고 외치고 다니기까지 하는 팔불출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무용을 하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간간히 무용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와 미흡한 정보력 탓에 공연은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다. 일단 공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제목과 일시, 장소, 출연 진 뿐인 상태로 예매를 했고 예매 이후에는 너무 바빠서 더 알아볼 생각을 못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내가 반성을 좀 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 이유는 뒤에 서술할 것.
공연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공연장으로 가는 길에 대해 말하고 싶다. 공연이 열렸던 곳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이다. 센터에 위치한 크고 아름다운 해오름극장의 변두리를 찾다 보면 나오는 다소 작은 극장인데 나름 2층까지 갖춘 전방위 극장이었다. 하여튼 3호선을 타고 동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내려 장충단공원을 쭉 가로질러가면 공원이 끝남과 동시에 갈림길이 하나 나온다. 유소년 야구장이 보이면 그대로 내려가는 길을 택할 수도 있고, 시간이 좀 여유롭다면 올라가는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시간이 과할 정도로 많았으며 원래 등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신나는 마음으로 오르막길에 오르기로 결심했다(실제로 나는 국내 여행을 할 때마다 등산을 하는 습관이 있다). 빨리 걸으면 한 10분 정도에 등산 비슷한 코스를 완주할 수 있고 그다음으로는 긴 산책코스, 소위 남산 둘레길이라고 불리는 코스가 나온다. 거기서 3킬로미터 정도 걷다 보면 남산타워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나중에 한 번 가볼 예정이다. 하여튼 여유 있게 쭉 걷다가 보면 내려가는 길이 또 하나 나오는데 그 길로 내려가면 도키도키하게도 국립극장이 나온다. 건물이 참 멋있게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원래 장충동 쪽에 유명한 건축가들의 건물이 많고 국립극장도 그중 하나이며 건축가 이희태 선생의 작품이라고 한다. 시간을 때우려고 건물 안의 카페 겸 레스토랑에 가서 파스타를 시켰는데 굉장히 창렬 했지만 비치된 책들을 읽을 수 있어서 시간을 재밌게 때울 수 있었다.
공연은 무서울 정도로 정시에 시작했다. 봄이 왔는데 내 마음은 겨울이라는 판소리계통의 구음과 함께 시작된 공연은 곧 해금과 드럼, 소금과 가야금과 피아노가 어우러진 강렬한 연주로 이어졌고 그 위에 섬세하게 얹어지는 보컬들은 관객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 후기의 부제는 사실 '관객의 마음에 가장 잘 호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일 것이다.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라는 제목의 뜻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하지 않는 악몽 같은 그림 속에 빨려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이다.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퉁쳐질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제목의 함의를 나는 공연을 보기 이틀 전이되어서야 알았고, 그에 대해서는 공연을 준비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연을 보기 전에 일부러 많이 걸었던 것도 생각을 정리하려는(예를 들면 내가 이 공연을 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는 것이 맞는 일일 것인가 와 같은) 의도가 있었는데, 결국에는 엉킨 생각의 실마리만 가진 채로 공연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관객에게도 모든 걸 잊을 만큼의 공감을 부여할 정도로, 공연은 호소력이 있었고 놀라웠다.
공연의 구성은 대략 이렇다. 국악과 포스트모던을 합친 장르를 만들어 연주하고 짧은 영상이 나온다. 연주와 영상은 각자의 내용을 명확히 담고 있으며 간간히 얹어지는 노래 가사와 무용은 그 내용들을 훨씬 더 명징히 전해주는 기제로서 작용한다.
영상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영상의 내용은 소외된 누군가의 삶부터 누가 봐도 '위안부'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는 악몽의 이미지까지 아우르고 있으며, 아무 일도 없던 시절 '소녀'라는 이름으로 치환되던 할머니들의 추억까지 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영상은 맨 처음에 등장했던 소외된 누군가의 삶인데, 다소 친근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의 모습, 달려가는 버스 창 밖으로 바라본 도시의 이미지 등) 그것이 누군가의 소외를 담고 있다는 것을 계속 주지 시킴으로써 평범한 우리의 삶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한다. 그런 '다른 각도'의 태도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수적인 태도라고 보는 입장이라서 그 영상과 곡만으로도 공연은 소기의 성과를 이룬 것이 될 수 있다(물론 공연은 성과 같은 걸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지만 공연이 담고 있는 주제가 주제인 만큼 어떠한 생각의 변화 같은 것은 이끌어내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다). 다른 영상들은 내 생각보다 많이 직설적이었데 처음엔 '왜 하필 저렇게 찍었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으나 그 솔직함이 호소력을 높이는 데에는 큰 효과를 내었다고 본다.
연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크게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일단 연주자들이 모두 자신들의 몫을 130퍼센트 정도 했다는 느낌이고, 그 능숙함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그렇기에 공연에 하염없이 몰두할 수 있었다. 가사가 없는 곡을 들으면서 그렇게 집중했던 적은 저번 3호선 버터플라이 공연 이후로 처음이었다. 드럼이라는 악기가 가지는 힘이 국악의 멜로디 라인과 어우러질 때의 상쾌함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해금이 내는 소리를 실제로 듣는 것은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많이 들었던 소리처럼 익숙한 기분마저 들었다.
연주를 듣는 것에 몰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곡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꽤 명확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상만큼 솔직할 수는 없지만 눈을 감고 들어도 연주자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 수 있었는데, 가끔 얹어지는 가사들 역시 시적인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위안부'라는 고통을 생생히 전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공연에는 선우정아도 참여했는데, 공연 클라이맥스에서 읊던 가사는 거의 충격적일 만큼 생생하게 와 닿았다.
마지막으로는 무용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한예리의 단독 공연이었고, 그의 무용은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느낌이 비슷했다. 일단 사람이 어떠한 말도 없이 몸 만으로 모든 감정을 쏟아내는 것과 그 감정을 관객들이 알아챈다는 것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고, 사람의 몸을 저런 방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니 더욱 놀라웠으며 영화의 캐릭터로만 존재하던 그가 눈앞에 있다는 것 역시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번 공연은 그러한 경이로움과 동시에 한예리의 감정선까지 느낄 수 있어 기억에 정말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일전에 마리텔에서 보여준 적이 있었던 승무와 창작무용을 결합한 무용을 보면서는 '위안부'로 통칭되었던 사람들의 감정까지 느껴져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다 떨릴 정도였다. 누구보다 놀라운 무용이었다고 생각된다.
공연이 끝나면서는 '위안부'할머니께서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우리는 '위안부'가 아니고, 각자의 이름이 있다며, 죽기 전에 문제를 꼭 해결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셨고 그래서 나는 문득 내가 이 공연을 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순간 깨달을 여러 가지 이유를 종합하면 아마 공감과 인지 따위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은 직접 공연을 본 사람이 아니면 아마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세밀하게 말하기 힘들 것 같다.
일련의 글을 쓰고 나니 공연을 본 직후와 비슷하게 무거운 마음이 되었다. 생각이 많이 복잡해졌고 일말의 무력감이 드는 기분이다. 문득 이런 공연이나 정보를 접하고도 누군가는 동의하려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공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아가야겠지.
어떻게든 힘을 내고 고통을 나누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