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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숭이같은비버 Aug 02. 2024

4-3. [외노자 회고록] 런던에서 첫 직장생활

그래도 런던에 적응하고 버티기

난 그래도 한편으론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상황에 압도되어 방어기제로 억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솔직히 내 학력, 백그라운드, 무경력인 상태에, 심지어 코로나 시기에 비자까지 지원받으며 런던에 취업할 기회를 얻는다는 건 쉽지 않은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서류 단계를 뚫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나는 당시 10개 내외의 회사 정도만 지원했던 거 같다.


좋은 점을 생각해 보면 일단 해외 생활을 이렇게 직장인으로서 해본다는 자체로 경험하고 배우는 것이 많았다. 어릴 때 해본 해외 생활과는 또 달랐다. 영국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각에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반추할 수 있었다. 런던도 대도시인지라 여유와 친절함이 넘쳐나진 않았고, 한국에 살면서 특별히 불만스럽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인들이 헬조선을 언급하며 해외에 살고 싶어 하는지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한국의 비교평가하고 서로를 재는 문화가 불편하고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런던에 살면서 그게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더 느끼게 되었다. 난 친구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에어비앤비에서 알게 된 친구 덕에 여러 모임에 나가게 되는데 그때마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두 번째로 회사 동료들과 상사가 무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좋은 분들이었다. 상사는 네덜란드인이었는데 마치 한국인들이 빨리빨리 문화를 말하며 스스로 효율적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자기는 네덜란드인이기 때문에 나이 직급과 상관없이 수평적인 사람임을 매번 강조했다. 실제로 이 말을 다른 네덜란드인 몇 명한테 들어봤다. 한 예로는 내가 데드라인보다 할 일을 일찍 끝내면 휴가를 따로 리포팅하지 말고 쓰라고 권유했다. 또 나는 아침잠이 많아서 정기 아침 회의를 주기적으로 빼먹었는데, 이 또한 보스가 아무 말 없이 이해해 줬다. 굳이 변명하자면 회의에 별 내용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쓸데없는 말로 회의시간을 무의미하게 채우는 경우가 많았기에 불참하는 거에 대해 죄책감도 거의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팀에 불만이 많음에도 매번 해야 할 일 그 이상을 해냈기 때문에 쓸데없는 규칙들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합리화했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보스는 아니었다. 또 내 보스는 불평 많은 할아버지 스타일이었는데 듣다 보면 기분 나빠지는 얘기까지는 아니었고 그런 솔직하게 중얼중얼거리는 모습도 난 인간적으로 좋았다. 팀원들도 다들 순한 편이었고 내가 힘들어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해해 줬다.


세 번째로는 배움이다. 나는 하루하루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계속 이건 좋은 기회라고 스스로를 다독였고, 정상적이지도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 와중에도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이 시간의 활용도는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인지했다. 틈틈이 링크드인에 들어가서 채용공고에 지원하고 다행히도 아주 간간히 면접을 볼 수 있었다. 이때 나는 업무의 기반이 되는 이론적 지식이 아직 많이 부족했고 방향성을 잘 찾지 못했는데 면접 질문들을 통해 내가 무엇을 보완해야 되는지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난 내가 대답하지 못한 면접질문들을 검색하고, 대학원 수업을 다시 복습했고, 온라인으로 강의도 들었다. 코로나 시기여서, 휴학생 신분으로 여러 대학원 수업을 온라인으로 청강할 있었다. 나중에는 나만의 워드 파일을 만들어서 줌으로 학부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솔직히 낭비한 시간이 훨씬 더 많았지만, 그래도 날 억지로 끌고 가려 노력했고, 그나마 느렸지만 한 발자국씩 전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는 내가 웬만한 내 또래 업계인들보다 훨씬 더 이론적 깊이가 깊다고 느낄 정도가 되었다.


이외에도 코로나시기에 영국 내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점, 집은 별로였지만 집주인분은 너무나도 좋은 분이었다는 점, 멘탈을 더 단련시킬 수 있다는 기회였다는 점 등 좋은 점은 많았다. 고통스러운 기간임에도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인지했기 때문에 너무 다행히도 이 기간을 완전히 낭비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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