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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Apr 20. 2020

미국 귀신과 한국 귀신

영혼들도 국민성을 반영할까

엄마의 옛 집은 보문동에 있었다. 층층이 돌계단을 올라 큰 대문으로 들어가면 양지바른 마당이 있고, 구석에는 온갖 꽃과 과일나무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는 너른 집. 그 집에서 이사 나오며 엄마의 행복한 유년시절도 함께 끝났지만, 엄마는 그 집에 대해 지금도 애틋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외삼촌은 달랐다. 그 집에 사는 내내 처녀귀신에게 시달렸기 때문이다. 전전 (혹은 전전전?) 집주인 딸이 연애 고민 때문에 그 집 마당의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했다. 그리고 밤마다 엄마보다 다섯 살 위인 외삼촌 - 당시 중고등학생- 방구석에서 웅크리고 노려본다고 했다. 가위에 눌리는 일도 허다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 비명을 지르며 방에서 뛰쳐나오거나 졸도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잖아도 손이 귀한 집에 장손인 외아들이니, 온갖 의원도 찾아가고 보약도 달여보고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 굿도 했지만 그 집을 떠날 때까지 이 귀신은 외삼촌을 놔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전 주인이 그랬듯, 외할아버지 사업도 아주 쫄딱 망해서 쫓기듯 나갔다. 집에 귀신이 붙은 거라고 어른들은 이야기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귀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 귀신들은 한국 귀신들과 다르다 싶다. 실용적인 민족답게 한국 귀신들은 대체로 목적이 분명하다. 장화홍련도 그랬고 콩쥐 쥐신도 그렇지 않았던가. 분명한 원한이 있고 그 한을 풀어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서 애먼 사또 여럿이 희생된 것 같지만...) 반면 미국 귀신들은 대체로 별다른 목적이 없다. 물론 컨저링같은 영화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 귀신 목격담(ghost sighting)들을 보면 미국 일반 귀신들은 심지어 자기가 죽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 그저 생전에 출몰하던 곳에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가끔 애기 귀신들이 같이 놀자고는 해도, 우리나라 물귀신처럼 '혼자 가기 외로워 누군가를 데려 가는’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짓은 하지 않는다. 심지어 1892년에 Lizzie Borden이라는 젊은 여자가 매사추세츠 주에서 잔혹하게 자기 아버지와 새엄마를 도끼로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 있었는데, 전국적인 논란 끝에 재판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집에서 낮잠자다, 집안일 하다가 갑자기 살해당한 아버지와 새엄마가 얼마나 억울하겠나. 심지어 가끔 그들의 유령 - 새엄마가 더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왤까 - 이 나타난다는 그 집은 최대한 원형을 유지한 채, 현재 숙박업소로 흥행 중이다. 우리나라 귀신같으면 투숙객 멱살을 잡든 빙의를 하든 벌써 원한을 풀었을 텐데, 목격담을 읽어보면 이 영혼들은 그냥 스르륵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지 않는다. 피츠버그의 귀신 들린 호텔로 유명한 William Penn 호텔도, 가장 귀신 목격담이 횡행한다는 Green Man's Tunnel도 마찬가지다.

1916년에 문을 연 William Penn 호텔. 투숙했다가 사라진 세일즈맨과 싸움 끝에 다른 직원을 살해한 호텔 직원의 귀신이 나타난다 한다.


사실 원래도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류의 이야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미국 귀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계기는 피츠버그로 이사온 이후부터였다. 피츠버그는 유명한 철강업자 앤드류 카네기 시절 (180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 엄청나게 번성했다가 급격한 쇠락의 시기를 겪고 인구가 엄청나게 줄었다. 다행히 요즘 다시 의료/교육 도시로 살아나고 있는 중이기는 하다. 어쨋든 집은 그대로 있고 사람들만 줄었으니, 사람들은 여전히 그때 만든 집들에 살고 있다. 한국에서 평생 아파트에 살다가, 미국 와서 유학 5년간 심지어 신축 아파트에서 살았던 나에게, 사람이 100년이 넘은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도 외관만 100년이고 안에는 싹 다 뜯어고쳤을 줄 알았는데, 집 사려고 돌아다니다가 기절할 뻔했다. 목재, 벽돌, 나무바닥 같은 외관은 물론이고, 화장실이나 부엌 아래를 지나가는 배관도 문제가 없다면 그대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100년 사이에 인류가 얼마나 비약적 발전을 했는데, 자동차는 커녕 도시가스도 들어오기 전의 시대에 지어진 집들이니 수리의 정도나 완성도가 정말 제멋대로였다. 아무데나 계단을 뚫어놓은 집이 있지 않나, 벽을 반만 제거한 집이 있지 않나...이런 기상천외한 구조들을 보고 처음에 꽤나 심란해하다가, 지금의 집을 사게 되었다. 그나마 모든 수리가 어느 정도는 되어 있는 집이라는 점에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에어컨 나오고, 중앙난방 시스템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시설이지만, 이곳 오래된 집들은 여전히 라디에이터를 쓰거나 창문을 뚫어 붙이는 에어컨을 쓰는 집도 많다. 게다가 집과 붙어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붕이 있는 주차장도 있었다. 그래도 1900년이라는 숫자에 살짝 위축되기도 했다. 남편에게 '귀신 나오면 어쩌지?’라고 물어봤더니, 남편이 웃으며 대답했다. "집이 지은 지 110년 넘으면 죽어나간 사람이 한둘은 아닐걸? 이 집만 아니라 동네 집들 다 그럴걸?"


1911 vs. 2020 우리 길에서 바라본 옆길의 집들. 포장도로만 바뀌고 똑같은 풍경이다.
스테인드 글래스

그렇게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만 7년이 되어간다. 살아보니 120년 된 집도 정 붙이고 살 만하다. 아파트처럼 획일적으로 찍어내지 않은 독특함이 좋고, 아주 묵직하고 오래된 나무계단과 바닥의 무늬도, 언제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없는 스테인드 글라스 창도 마음에 든다. 물론 인건비 비싼 미국이기에 수리/교체나 공사에 드는 비용이 비싸고, 단독 주택이라 귀찮은 일들도 있다. 봄에 튤립을 보고 싶다면 전년도 가을에 구근을 심어야 하고, 여름에는 스프링클러를 조정해야 하고, 가을에는 낙엽을 치워줘야 하고, 겨울에 눈이 올 때는 소금을 뿌리고 눈을 치워야 한다. 그래도 이런 일들을 너무 괴로워 하지 않고 적당히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이처럼 치우고, 너무 힘들 땐 사람도 부르고, 가끔 게으름도 부리며 해 나가면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고 즐겁게 넘길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족과의 관계 그 자체지, 내가 사는 곳이 미국의 120년 된 집인지 서울의 신축 아파트인지는 아니라는 걸 배우고 있다. 그리고 아직 귀신을 보거나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행여 존재를 드러내더라도 괜찮다 - 미국 귀신일 테니까.  

대대적인 화장실 공사 시 벽을 뜯었더니 1900년대 구조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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