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성 창업자 시리즈 <1> 토리 버치
미국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데, 이 나라에서도 자수성가 여성 부자 (self-made woman millionaire)라는 말은 한국에서 만큼이나 여전히 낯이 설다. 여성 부자 순위를 찾아보면 10위권 안에는 월마트 집 딸, Koch 가문 딸, 아마존 제프 베조스 전처, 마스(Mars - M&M 초코 집) 손녀, 애플 스티브 잡스의 미망인, 피델리티 투자 손녀 등 상속형 부자만 올라와 있다. 10위권으로 가야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자수성가형 여성들은 대체로 셋 중 하나다. 첫째,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버린 1세대 창업자들은 남편과 함께 맨손으로 고군분투하며 사업을 일으켰다. Diane Hendricks는 건설자재 유통업 왕국을 건설했고, Doris Fisher는 의류 브랜드 갭(Gap)을 만들어냈다. 두 번째는 스타트업 붐에 적절한 타이밍에 올라타 성공한 엘리트들, 이베이의 초기 멤버로 나중 휴렛패커드의 CEO도 지낸 Meg Whitman, Lean In 책으로 유명한 페이스북의 Sheryl Sandberg, 야후의 Marissa Meyer 같은 여성들이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연예계에서의 입지를 바탕으로 비즈니스 왕국을 만들어 낸 오프라 윈프리나 비욘세, 마돈나 같은 이들도 빼 놓을 수 없다.
하지만 오늘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여성 창업자는 이 셋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애매하게 걸쳐 있는 인물이다. 금수저인 건 맞는데, 상속형 부자는 아니다. 아이비리그를 나온 건 맞지만, 스타트업 임원자리를 일찌감치 꿰 차 성공한 것도 아니다. 꽤 셀렙이었지만 연예인도 아니다. 창업한 지 불과 15년 만에 미국을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로 성장한 토리 버치 (Tory Burch)의 수장, 토리 버치(Tory Burch) 이야기다.
자그마한 체구에 중단발을 넘지 않는 금발. 언뜻 봐서 나이가 가늠이 안 되는 이 언니는 1966년생으로 50대 중반에, 스무 살이 넘은 아들 셋을 둔 중년의 아줌마다. 여전히 이쁘고, 날씬하고, 패션 브랜드의 수장이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옷도 잘 입는다. 반세기째 변화라고는 없는 것 같은 랄프로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미국 브랜드 계에, 토리 버치는 클래식함을 유지하면서도 한껏 더 화려하게 혜성처럼 등장했다. 패턴과 컬러를 과감하게 쓰는 이 브랜드의 범상치 않음은 이제 시그니쳐 컬러가 되어 버린 매장 문짝에서도 드러난다. 이 주황색 매장 문과 초록과의 강렬한 대비를 보라.
토리버치는 필라델피아 외곽의 밸리 포지 (Valley Forge)라는 동네 출신이다. 아버지가 종이컵 회사를 상속받은 부자라 어릴 때부터 금수저로 자랐다. 사립학교를 나와, 유펜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토리버치 브랜드 뉴스레터에 토리버치의 개인적인 사진과 어머니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는데, 당시 사진을 보면 어머니가 대단한 미인이었다! 아버지는 그레이스 켈리 (나중에 모나코의 왕비가 되었다가 자동차 사고로 요절한 바로 그녀. 그레이스 켈리도 필라델피아 인근 출신이라 필라델피아에는 Kelly Drive라는 드라이브길이 있다)와 사귀었던 사이고, 한때 배우였던 어머니는 스티브 맥퀸과 율 브리너와 만났단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듯, 토리버치 브랜드의 흥행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플랫 슈즈 이름을 Reva (어머니 이름)라고 지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뉴욕으로 가서 패션 쪽에서 일하기 시작. 처음에는 디자이너 어시스턴트, Harper's Bazaar 잡지에서도 일하다, 나중에는 패션 브랜드에서 PR을 담당했다. 이때 일했던 브랜드가 폴로 랄프로렌, 베라왕, 그리고 로에베였다고 한다. 부잣집 아들이랑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재혼해 아들 셋을 낳았다. 창업자로서 첫 발을 내 딛은 것은 쌍둥이와 막내가 아직은 어릴 때, 두번째 남편이었던 Christopher Burch (그래서 토리 "버치"가 되었다)와 함께 자기 아파트에서 본인 브랜드를 만들고 뉴욕의 노리타 (Nolita) 지역에 샵을 열게 된 것이었다. 나름 소박한 시작이었지만, 그전에 이미 보그 잡지에도 패션 전문가로 나오고, 업계에서는 꽤나 유명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뉴욕의 패션 업계에서 이름 좀 날렸다 하는 사람들이 브랜드 열었다가 망한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이 언니는 자기 샵을 연 첫날, 재고가 거의 다 팔려나가는 신공을 발휘한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다가 결정적으로 1년 후 오프라 윈프리 쇼에 초대받는 영광을 누린다. 오프라가 토리버치의 재능과 야심을 알아본 것인지 그녀더러 "next big thing in fashion"이라고 칭찬한 덕에, 그날 웹사이트 방문자가 8백만 명으로 폭주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2005년이라 8백만 조회수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엄마의 이름을 딴 플랫슈즈 Reva를 출시한다. 지금은 플랫 가격도 좀 올랐지만, 당시만 해도 $195라는 그나마 합리적인 가격에 깔끔한 디자인과 좋은 품질이 유명 연예인부터 일반인까지 사로잡아, 토리버치는 드디어 전국구 브랜드로 도약하게 된다. 아주 싼 가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살 정도로 비싸지도 않은 가격에 미국 중산층 여자들이 열광했다. 내가 2007년에 유학을 왔는데, 주변 사람들 중에 이 플랫으로 토리버치에 입문하여 색깔별(은장/금장 로고), 소재별 (누빔, 가죽, 고무 등), 디자인별(뒤꿈치 부분이 고무줄인 거, 힐 펌프스, 통굽 등)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2006년에는 브랜드의 탄생에 주된 역할을 한 남편 Burch와 이혼했다. 게다가 그 후로 몇 년간 지저분한 소송까지 진행했다. 전남편은 토리버치와 이혼하자마자 복수심에 그랬는지, 야망에 불탄 건지, 꼭 토리버치랑 비스름한 브랜드를 론칭했다. 토리버치 매장 인근에 형광 초록 대문을 가진 자기 브랜드를 연 것이다 - C Wonder라고. 원래 벤처캐피털리스트라 돈이 없던 건 아니라서 (토리버치의 지분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적인 투자와 아낌없는 지원으로 성공시켜보려 했으나, "전처의 스케치패드에서 한 장 찢어 나온 것 같다"는 평가를 받다가 결국 토리버치 쪽에서 "우리 꺼 따라 했으니 장사 못 하게 해 달라"며 소송을 걸었다. 실제 매장 인테리어나 제품 색감 등이 매우 비슷하긴 했다. 제품 가격을 비싸게 유지하고 싶어 했던 토리버치와 다르게 전남편은 가격을 내리자 주의였기 때문에 콘셉트를 비슷하게 유지하면서 가격만 싸게 제공하면 더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기도...어쨌든 소송 결과 매장은 문을 닫고, 전남편이 보유하던 토리버치 사 지분 또한 거의 다 팔게 되었고, 덕분에 토리버치는 1조 원대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토리버치는 2018년에 안티구아에 소유한 본인 저택에서 조촐하게(?)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가 300억 원에 매입한 이 자택의 원 주인은 리스테린(입냄새 제거해 주는 항균 마우스 워시) 개발자의 손녀이자 사교계 명사였던 Bunny Mellon으로, 재키 케네디가 절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가장 콧대를 누르고 싶어 했던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후로 계속 승승장구한 토리버치는 이제 미국에만 250개의 매장이 있고, 웬만한 중상층 이상 백화점에는 다 입점했다. 옷, 신발, 가방에서 home (그릇 등)와 스포츠 라인 (Tory sport)으로 라인도 대거 확대하였으며, 이제는 미국의 아이콘으로 인정받아 이방카 트럼프마저 해외 순방 시 애용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소비자로서 토리버치의 옷이나 신발의 매력은 화려하지만 고급스러운 디자인,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토리버치가 아주 영리한 창업자인 이유가 여기에 숨어있다. 뉴욕의 패션업계에서 PR을 했던 경험 덕분인지, 그녀는 본인의 브랜드가 실제 가격에 비해 더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쉽게 말하면, "명품이 아닌데 명품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토리버치 제품의 가격을 보면 분명 한국 백화점 1층에서 보는 명품 수준은 아니다. 한국 국내 브랜드(물론 그것도 천차만별이지만...)와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그런데 토리버치는 브랜드 이미지를 이 가격대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게 가져간다. Tory daily라고 주기적으로 브랜드에서 가입자들에게 보내는 newsletter에 실리는 사진들을 봐도 본인 집이나 사무실 같은 공간에서 자기 브랜드 옷을 입은 사진을 자주 띄우는데, $200짜리 토리버치 신발이 아니라 $1200짜리 에르메스 신발을 신어도 손색없을 것 같은 공간과 패션을 보여주는 식이다. 매장을 방문해 봐도 알 수 있다. 어디 앉을 구석도 없이 좁은 케이트 스페이드 매장 같은 데 비해, 넓은 실내 공간, 안락한 벨벳 소파, 초록색 벨벳 드레싱룸 등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쇼핑 경험을 제공한다. 게다가 은근 꿀팁 - private sale도 종종 하기 때문에 "어머 이건 사야 해!"의 충동을 한 달 정도만 자제할 수 있다면, 왠만한 제품은 30%가량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여성 부호뿐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에도 이름을 올리는 토리버치는 이제 여성 창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Tory Burch Foundation이라는 재단을 만들어 매년 여성 창업자들을 지원해 주고 있다. 대출업체와 연계하여 일반적인 대출을 받기 힘든 여성 창업자들에게 자본을 제공하고, 대학과 연계하여 비즈니스 교육을 실시하며, 매년 50인의 Fellow를 선정하여 커뮤니티를 만들고 투자자들에게 피치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제까지 무려 2800명 이상의 여성 창업자들에게 600억 원 (USD 50 million)의 저리 대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매년 Embrace Ambition Summit이라는 이벤트를 여는데 리즈 위더스푼, 애슐리 쥬드 등 유명 인사들이 연설자로 초대받아 여성들이 자기 능력을 펼쳐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대하여 도움을 주고 있다.
토리버치가 여성 창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Embrace Ambition! 남성들이 야심 찬 모습을 보일 때는 칭찬받지만, 여성이 야심 찬 모습을 보일 때는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비판받기 쉽다는 걸 이해한다. 본인 또한 사업 초기에는 야심차 보일까 봐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적이 있음을 고백하여, 문화적으로 체득되어온 이러한 선입견과 이중잣대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권한다. 본인의 성공을 만들어 온 순간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 직감을 신뢰했던 때라며.
(2편에는 패션 계의 일대 파란을 몰고 온 하버드 MBA 출신, Rent the Runway의 창업자 이야기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