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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May 02. 2020

패션계의 넷플릭스를 세운 제니퍼 하이먼

미국 여성 창업자 시리즈 <2>  '렌트 더 런웨이'의 제니퍼 하이먼

퀴즈 - 패션 업계의 일대 혁신을 몰고 올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데 필요 없는 것을 고르시오.


1. 대담함과 적극성

2. 뛰어난 패션감각  

3. 남다른 문제 해결 능력

4. 개인적 이익을 넘어서는 사명에 대한 헌신  


하버드 MBA 1학년이었던 제니퍼 하이먼(Jennifer Hyman)은 뉴욕에 사는 여동생에게 놀러 갔다가, 동생이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파트 월세보다 비싼 명품 원피스를 구매했음에 기함한다. '옷장에 이렇게 많은 옷들을 왜 안 입는 거야?'라는 언니의 말에 동생은, '이 옷들은 내 친구들이 다 봤고 사진도 찍혔단 말이야'라며 울상을 짓는다. 그 순간 하이먼은 여자들에게 있어 옷이 단순히 실용성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소유물들과는 다르게) 이 옷이 내 소유인지 아닌지의 여부보다는 그 옷을 입고 스스로 자신감을 얻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경험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연휴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 다른 창업자인 제니퍼 플라이스(Jennifer Fleiss)와 점심을 먹다가 의기투합하여 '명품 드레스를 빌려주는 사업'을 하기로 결정한다. "엄청난 잠재력이 있을 것 같아!"라기보다는 "재미있겠어, 한번 해보자!"라는 맥락에서.


누구에게 연락해보면 좋을까 생각하던 그녀들은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Diane Von Furstenberg)라는 미국 디자이너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이메일 주소를 알아서가 아니라, 어차피 미국 회사 이메일은 '사람 이름@회사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 최대한 다양한 버전으로 쓰자! 는 어찌 보면 단순 무식한 아이디어로. 그런데 될 일은 하늘이 돕는다고, 그날 오후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가 자기 오피스에서 그 이메일을 열어봤다. 그래서 다음날 오후 5시에 보자고 답장을 보낸다.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이 두 용감한 학생은 유명 디자이너 사무실에 들어가며 새로운 스타트업, Rent the Runway, 의 공동창업자로 스스로를 소개하게 된다. 하루 만에 회사 이름까지 일사천리로 생각해 낸 것. 하지만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는 이들의 아이디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때만 해도 하이먼과 플라이스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렌털 비즈니스가 아니라,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의 웹사이트에 렌털 부분을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생각이었고, 관록 있는 60대 사업가였던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는 이것이 자신의 매출을 갉아먹으리라는 점을 우려했다. 결국 다음번 미팅을 위해 뉴욕으로 향하던 그녀들에게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의 조수가 전화해 더 이상 관심 없으니 오지 마라, 진짜 너네 안 보고 싶다, 라고 했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용감한 이 두 여자는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이들의 용기에 감동했는지 아니면 이들을 빨리 내쫓고 싶은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이앤은 렌트 더 런웨이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직관적인 조언을 하게 된다: 다른 디자이너들을 여럿 참여시키면 나도 참여하겠다,라고. 덕분이 그들은 사업의 타겟을 소비자로 돌리게 된다. 이쯤이면 사업계획서를 그녀들이 아니라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가 만들어 준 셈이다.


렌트 더 런웨이는 이 지점부터 지금의 형태를 향해 진화하게 된다. 시장조사를 위해 둘이 모아둔 돈을 털어 드레스를 100개 정도 사서 캠퍼스에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하버드 학부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0부터 12까지 사이즈별로 다 사지 않고, 자기들 사이즈로 샀다 - 사업 실패하면 본인들 옷장이라도 꽉 채우려고. 여학생들이 이 옷들을 대여할 의향이 있는지, 가격은 얼마 정도면 적당할지, 그들이 대여하고 반납한 옷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우편으로 보낸다는 게 말이 되는 건지 등을 찬찬히 조사해 나간다. 동시에 여성들에게 있어서 패션이란 합리성과 실용성을 넘어선 그 무엇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2009년은 넷플릭스도 우편으로 DVD를 보내주던, 말하자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으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본격적으로 문을 연 렌트 더 런웨이는 처음에는 결혼식이나 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드레스를 대여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일상복, 운동복, 아동복, 이제는 이불이나 쿠션 같은 가정용품까지 범주를 넓히고 기술과 물류 부분에 끊임없는 개선을 이루었다.


창업 후 10년을 찍은 2019년, 렌트 더 런웨이는 1.2조 원 (미화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았고, 1000만 이상의 구독자에, 연 12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6500억 원 이상의 펀딩을 받았다. 미국 유니콘들이 대부분 엄청난 적자 출혈에 시달리는 것과는 다르게, 심지어 2016년 이래로 수익도 나고 있다.


제니퍼 하이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CEO로 재직 중이며, 제니퍼 플라이스는 우호적인 관계에서 최근 회사를 떠났다. 첫 아이 같은 렌트 더 런웨이를 떠나 다음 도전을 향해 나가고 싶다며. 둘 다 회사 지분을 13%씩 보유하고 있다. 재고가 필요한, 게다가 그 재고(드레스)들이 상당히 비싼 아이템이다 보니 일찌감치 벤처캐피털의 지원을 받으러 나섰다. 초기에는 자금이 없어 craigslist (미국의 온라인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 사진사를 구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름 알리기도 쉽지 않아 여름에 극장 앞에서 서성이다 영화 보러 온 여성 관객들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는데, 그렇게 낚은 이메일 중에 뉴욕타임스 테크 기자가 있었다. 그 기자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결국 이들은 뉴욕타임스에 실리는 데 성공한다. 어두운 세탁소 안에서 화려한 파티 드레스를 입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한 명은 사다리에 올라서고 다른 하나는 기대어 - 이 기괴스러운(?) 사진은 나머지 뉴욕타임스 비즈니스 섹션의 첫 면에 실리게 되고, 이 기사를 보고 100,000 이 (미국의 스케일이란) 서비스를 구독했다고 한다. 덕분에 투자자들의 러브콜도 이어졌다. 돈 구하러 다니기 급급하던 상황에서 갑자기 투자자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진을 치는 광경이 펼쳐졌다니, 스타트업계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따로 없다. 그 후로 알리바바의 마윈, 클라이너 퍼킨스 등이 앞다투어 투자했다. 기업공개는 예정된 수순이다.

출처) 뉴욕타임스. 바로 이 사진이 하루아침에 렌트 더 런웨이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미국에는 Rent the Runway와 비슷한 의류 대여 서비스가 여러 곳 있고, 이미 기업공개를 성공적으로 마친 Stitch Fix 같은 회사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회사가 패션계의 넷플릭스라고 불리는 이유는 '옷장 없는 패션'이라는 완전히 상반된 미래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옷장에 얼마나 많은 옷을 소유하는지가 패셔니스타를 결정짓는 시대는 지났다. 하버드 MBA에 가기 전, 스타우드 호텔에서 일했던 제니퍼 하이먼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소유보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점을 영리하게 간파했다. (반면 Stitch Fix는 설문조사 결과와 알고리즘을 통해 내 패션 성향을 파악하여 스타일링한 결과물을 보내 사흘 내에 구매를 결정하도록 유도하므로 결국은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 같은 보통 사람도 옷장에 많은 옷이 있지만, 새로운 계절이 될 때마다 당최 '입을 만한 옷'은 보이지 않는다. 소유권보다 접근 가능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패션 공유 산업과 렌트 더 런웨이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남이 입던 옷을 입냐고? 찝찝하다고? 렌트 더 런웨이를 창업하기 전에 제니퍼 하이먼이 찾아갔던 Neiman Marcus (미국의 고급 백화점)의 CEO인 짐 골드의 말에 의하면, 부자들이 주 타겟인 이런 고급 백화점에서도 의도적으로 옷을 사 가서 입고 리턴하는 고객이 부지기수란다 - 심지어 전날 새해 파티를 마친 1월 2일에는 그 숫자가 급증해 브랜드에 따라 30-70%에 달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번 사가면 반품 교환이 어려운 한국과는 다르게, 미국은 심각한 파손/얼룩이 있지 않은 한, 리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게다가 렌트 더 런웨이가 단순 패션회사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이 회사의 1200명 직원 중에 패션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은 단 10명뿐이다. 나머지는 물류와 드라이클리닝에서 일한다. 이미 이 회사는 160,000 스퀘어피트에 달하는 회사 창고를 세워, 세계에서 가장 큰 드라이클리닝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엄마라면 알 것이다. 옷장 밖을 나서기만 해도 비싼 옷을 망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유해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 큰맘 먹고 산 캐시미어 베스트에 장염인 줄도 몰랐던 아이가 토했을 때, 유치원에서 엄마를 발견하고 달려온 아이가 빨간 피자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하얀 실크 블라우스에 꾸욱 꾹 비벼줄 때, 그 당혹감이란. (100%) 내 잘못은 아니었다고 세상에 외치고 싶다. 실제로 렌트 더 런웨이에서 가장 구하기 어려운 전문가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얼룩 빼는 기술자라 한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어디 나갈 데가 없어서 해지하기는 했지만, 한때 구독했던 렌트 더 런웨이의 무제한 멤버십(당연한 말이지만 100% 내 돈 주고)의 개인적인 만족도도 높았다. 언젠가는 내 주관적인 사용기도 나누고자 한다. 퀴즈 정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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