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브루스 윌리스가 찾는 ‘특별함’은 다르다
사람이 살면서 저지르는 실수란 게 희한하게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나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는 '장고 끝 악수'다. 처음에 떠오르는 대로 하면 차라리 나을 것을, 괜히 오랫동안 고민하고, 알아보고, 더 깊이 찾아보다가 결과적으로는 처음만 못한, 심지어 비합리적이기까지 한 선택을 내릴 때가 있다. 오목조목 균형 있게 따져보고 생각하는 습관이 들지 않아서인지, 혹은 종합적인 판단력이 부족해서인지 모르겠다. 다행히 나이가 들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또 아이들 때문에 오래 고민할 수 있는 여유가 부족해지면서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는 것 같긴 하다. 어쨌든 내가 이 문제를 인식하게 된 계기는 내 신혼여행 때였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신혼여행은 '특별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유학 중 만난 남편과 10개월 만에 급히 결혼하느라 결혼식은 '만족도 90%'만 목표로 해서 효율적으로 해치운 터였다. 그래서 신혼여행에 더 집착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한 게 문제였다. 결혼식은 한국에서 올렸으니, 가까운 발리나 몰디브도 괜찮았을 텐데, 발리는 전에 가 봤고, 몰디브는 당시 주변 사람들이 워낙 많이 가니 언젠가 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에서 가기 수월한 멕시코나 바하마 정도 갔으면 되는데, 여긴 미국인들이 워낙에 많이 가다 보니 성에 차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혼여행인데', 진짜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일생에 다시 못할 경험이길 바랬다. 만 서른 살이 되지 않았던 때니 허세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엄청난 시간을 들여 알아본 끝에, 이름도 낯선 Turks & Caicos라는 섬에 있는 Parrot Cay라는 리조트를 선택했다. Turks & Caicos 안에서도 본섬이 아니라, 보트를 타고 30분은 들어가야 하는 한적한 섬. 클린턴 부부, 빌 게이츠 부부 등이 방문했을 뿐 아니라 브루스 윌리스는 아예 리조트에 프라이빗 풀빌라까지 소유하고 있다는 곳, 그래서 친한 벤 애플렉과 제니퍼 가너가 결혼식을 올렸다는 리조트. 하얏트나 힐튼 같은 흔한 호텔 체인이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쏙 들었다. 풀빌라 가격을 알아보니 1박에 천만 원가량. 당연히 꿈도 못 꾸고 머얼리 바다가 보일락 말락 한 방 하나를 잡았는데 숙박 가격도 비쌌지만 밥 먹으러 매번 편도 30분씩 배를 타고 나다닐 수가 없어 삼시세끼 meal plan까지 미리 구매했다. 정말 '특별한' 경험을 기대하면서.
첫날, 리조트로 향해 옥빛 바다를 질주하는 보트 안,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달리 나의 마음속엔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보트 안에서 밝은 표정으로 샴페인 플루트를 들고 있는 투숙객 중 우리가 가장 어렸기 때문이다. 단순히 어린 정도가 아니었다. 대부분 60대 이상이고, 가장 젊은 이들도 50대 이하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들 대단한 멋쟁이들이기는 했지만 '혹시 리조트에 가면 울 엄마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만 있는 건 아닌가' 괜스레 걱정이 됐다. 그래도 도착하면 다르겠지, 애써 불안을 가라앉혔다.
막상 리조트에 도착하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르신들'조차' 찾아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고급'이란, '사람들이 바글거리지 않고 한적한'이라는 의미라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하루 종일 리조트 안의 온갖 시설을 어슬렁거려도 다른 투숙객 10명 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주가 특별히 손님이 없는 거냐 물었더니, 예년과 다름없으며 손님은 많단다. 리조트의 프라이빗 비치에는 고운 쌀가루 같은 흰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이 있었는데, 여기에서조차 직원들과 마주칠 일을 최소화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적적한 바닷가에서 놀다가 Parrot Cay라고 쓰인 푸른색 깃발을 모래사장에 꽂으면 갑자기 어디선가 홍반장처럼 흰 폴로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직원이 뛰어왔다. 얼음물이든 칵테일이든 수건이든 친절하게 요청을 들어 주었다. 고맙기는 했는데, 살짝 무섭기도 했다. 게다가 모래사장의 비치체어에 한참 누워있어도, 바다에서 수영을 해도, 몇 시간 동안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만일 영화 죠스처럼 백상아리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신고해 줄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깃발을 꽂을 여유는 없을 테니). 수영을 잘하는 남편조차, '바닷물 속에 계속 홀로 있으니 무섭다'며 일찍이 나왔다.
다행히 음식은 맛있었다. 삼시 세 끼를 즐기기 위해 신행 기간 내내 종일 운동했을 정도다. 아침을 먹고 나면 산책하고 라이브러리에 가서 당구 치고, 테니스장 갔다가 (테니스라기보다는 공 줍기), 점심 먹고 헬스장 갔다가 오후에 수영장에서 놀면서 간식 먹고, 낮잠 자고, 바닷가에 나가서 물놀이하고 저녁을 먹었다. 서비스도 훌륭했다. 리셉셔니스트도, 방 치워주시는 분도, 식사 가져다주시는 분도, 식당에 계시는 분들도, 심지어 정원 관리하시는 분들도 엄청나게 친절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이름을 기억하고 밝게 인사를 건네고, 길을 물어보면 어디든 차근차근 데려다주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필요한 게 없는지 체크하며 요청사항은 지체없이 처리해 주셨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외모가 너무 친근했다. Turks and Caicos 섬의 인종 구성은 88% 흑인, 8% 백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직원분들은 동남아시아 분들처럼 생겼다. 어느 날 식당 분과 이야기하다 알게 되었다.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 리조트의 모든 직원을 인도네시아에서 데려 왔다는 걸... 어쩐지, 캐리비언에 있는데 동남아에 있는 느낌이 들더라니. 그래, 미국에서는 한국과는 달리 동남아시아 여행이 럭셔리의 끝판왕으로 여겨진다. 하긴, 2018 기준 미국인 중 여권을 보유한 사람이 40%밖에 안되고 (한국은 63%), 2018년 기준으로 해외로 나간 미국인은 28%에 불과하며, 그나마 여권 없이도 갈 수 있는 캐나다와 멕시코가 절반 이상이다. 개중 아시아 대륙을 방문한 사람은 전체 인구의 5%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니, 동남아시아에 출장도 아닌 여행으로 다녀왔다는 사람이 얼마나 드물겠나. 비행시간만 20시간이 넘는데. 반면, 인천에서 7시간 직항만 타도 발리 다녀올 수 있었던 나로서는, 지구를 굳이 반 바퀴 돌아 발리에 여행 온 듯한 기분이었다.
가장 허탈했던 순간은 내 방에 들어섰을 때다. 호텔 홍보 문구에 쓰인 미니멀리즘과 자연친화주의(Eco-friendly)라는 말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 차마 방 내부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리석이나 화려한 조각 따위는 쓰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주황색 타일 바닥을 두른 방 한가운데는 모기장같이 생긴 커튼을 두른 원목 침대와 장식 하나 없는 단순한 가구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젠가 사진 속에서 본 1800년대 청교도들의 집 같았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화장실. 이제 10년도 훌쩍 넘은 일이라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지만, 화장실 근처 어딘가 - 세면대/샤워실/양변기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던가 - 싸릿대 울타리 같은 게 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 시골 할아버지 댁의 20년 전 재래식 화장실이 떠올랐다. 비슷한 가격에 갈 수 있었을 아루바 리츠칼튼의 대리석 욕조가 떠올랐다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 리조트가 "장고 끝 악수"였다는 점을 인정했다. 다행히 남편은 신혼여행에 대해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긍정적인 남편 덕분에 나도 초반 충격에서 벗어난 후엔 나름 즐겁게 지냈다. 맛있게 먹고, 화려한 비키니를 입은 할머니, 멋진 셔츠에 시가를 문 영화배우 같은 할아버지들을 보며 감탄하고, 유명한 셀렙 부부를 수영장에서 만나고 흥분해서 아는 척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별도로 자세히 풀도록 하겠다 - 사진과 함께!) 그러고 보니, 음식 맛있고 손 하나 까닥할 거 없으니 신선놀음도 따로 없었다. 아이 둘에게 매일 치이는 지금이라면 그 고요함과 타인의 수고가 더 소중할 텐데, 아직 책임질 자식도, 생계도 없던 어른 아이 둘에게는 다소 무료하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저녁, 야자수 아래에서 식사를 하고 천체망원경으로 별도 구경했다. 와인 한 병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 여행을 오기 전 내가 찾고 싶었던 '특별함'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다. 매일의 일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무엇이니까, 아마도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깍듯한 서비스, 여유로움, 맛있는 음식과 같은 것들이었을 것이다. 각각이 얼마나 의미있는 지를 따지자는 건 아니었지만, 어쨋든 이 리조트가 제공하는 ‘특별함’이 나에게 맞춰진 게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브루스 윌리스 같은 이들에게야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소중하겠지만, 나에게는 별 거 아니니까.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발리까지 가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발리에서 온 직원들이 이국적으로 보여 좋겠지만, 한국에 있을 때 맘먹으면 다녀올 수 있는 내게는 별 의미가 없으니. 반면, 대리석 욕조는 브루스에게는 일상에 불과한 거겠지. 지갑을 (많이) 열 때는, 최소한 내가 원하는 특별함이 무엇인지는 파악을 하도록 하자고 다짐하며 신행은 끝났다.
12년이 지났다. 두 어린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 기대하는 '특별함'이 조금은 더 분명해졌고, 노하우도 생겼다. 무조건 이동 시간이 짧고 이동 절차는 간단해야 한다. 비행기 갈아타고 셔틀타고 선착장으로 가서 배를 탄다고? 노노. 여전히 장고하지만, 이제는 tripadvisor 후기를 판다- 5년전 호텔 방 넘버까지 찾아서.
(출처를 명기한 사진 외에는 모두 직접 찍었습니다. 옛날 아이폰 1세대로 찍은 사진이라 화질이 선명하지 않네요. 그리고 리조트에 대한 이야기는 2008년 당시 이야기입니다 - 지금은 많이 변했을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