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튼 MBA를 졸업하다. 백수로. <5>

일과 삶은 양립할 수 있을까

by 박쌤

"일에 그런 게 어딨어? 일은 원래 다 재미없는 거니까, 그냥 돈이라도 많이 주는 직장 가."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대학원 같이 다닐 때 '오퍼를 받은 일'과 '재미있을 것 같은 일' 사이에서 고민하던 친구에게 내가 저렇게 말했다는 거다. 정작 그 친구는 웃으며 한 이야기지만, 나는 꽤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 엄마가 늘 나에게 "넌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냐?"라고 핀잔을 주곤 했는데, 엄마 말은 역시 옳았던 거다. 그때만 해도 경험이란 게 일천했던 나는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몰랐던 거고.


<3> 편에서 이야기했지만,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일이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일이라고 해서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원더키디의 2020년의 사회는 개인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 믿는다. 가정, 취미생활, 친구관계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에만 100% 쏟아붓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도무지 행복할 수 없는 이들도 존재한다. 개인의 선택에 대해서 사회가, 조직이, 가족이, 친구가 비난하거나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서는 안된다. '너는 돈을 잘 버니까 애들 얼굴 못 보는 건 참아야지'라든지, '월급도 적은데 취미는 무슨' 같은 말은 남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가벼운 커리어 초반에는 일에 모든 걸 걸기도 하지만, 결국 삶은 균형이다. 나중에 모든 것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 동시에 여러 접시를 떨어뜨리지 않고 돌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때문에 일과 삶은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융통성 없는 조직에서의 일과 삶의 조화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에게 창업 혹은 프리랜서처럼 자유로운 형태의 직업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어느 정도 안정되기 전에는 일반 회사원보다 고민도 많이 해야 하고 더 긴 시간 일해야 할 수도 있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 일을 오후 2시에 할 지 새벽 2시에 할 지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물론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내가 직접 해 보니 엄청난 장점들이 존재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선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본인이 정해진 루틴에 딱딱 맞춰 살아야 하는 사람이든, 나처럼 영감이 떠오를 때 쉬지 않고 10시간을 달리는 사람이든 관계없다. 모로 가도 약속한 결과물만 약속한 납기 내에 제출하면 된다. 본인의 생산성과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서 자기가 정하면 된다. 내가 직장인일 때 정말 싫어하던 출퇴근을 겪지 않아도 된다. (정말 지하철 2호선이라도 타는 날이면 회사에 도달하는 순간 그날의 에너지 50%가 방전되는 기분이었다) 간혹 시즌을 타는 업종도 있다. 일례로 MBA 지원은 9/10월과 1월, 이렇게 두 번의 성수기가 있기 때문에 비수기 또한 존재한다. 나는 성수기에는 종일 돌아가는 스키장 리프트처럼 하루에 15시간은 거뜬히 일하지만,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역시 리프트와 비슷한 상태다. 이 시간을 통해 내 마음에 고갈된 여유를 채우기도, 겨우내 한 집에 살면서도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던 애들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 ("엄마는 맨날 일만 해!")을 지우기도, 아이들 학교이나 교회에서 맡고 있는 봉사활동에 주력해 사라졌던 존재감을 피력하기도 한다. 그리고 6월에 한국에 가면, 그 해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상담이 몰리는 주말에는 8시간 내리 스타벅스 한 자리에 앉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아침에 토즈 스터디센터 문 열고 들어가 깜깜한 밤에 목이 쉬어서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쉴 때 충분히 재충전을 했으니 기꺼이 다시 열일 모드로 진입할 수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서울 안에서 교통 체증과 싸우며 장소까지 이동해야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오면 그런 제약 없이 고객들과 아침저녁으로 소통할 수 있다. 내 친한 대학 친구 하나는 통계를 전공해서 게임회사에서 통계 분석하는 일을 하다가, 사내에 별도의 통계실을 둘 수 없는 작은 회사들의 통계분석을 해 주는 회사를 차렸다. 배우자의 직업 때문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데도 어느 대륙에서든 훌륭하게 일을 해내는 중이다.


조직생활의 스트레스도 덜하다. 물론 이 부분은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사람이란, 회사를 떠나는 이유가 되기도, 남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회계사로 일할 때 일은 재미없었지만, 같이 일하는 (대부분의, 다는 아니고) 사람들이 좋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조직생활에서 마음의 병을 앓게 된 계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은 살인적인 야근이 아니라 내 옆에 앉은 이로부터 받은 상처다. 물론 프리랜서에게는 상사는 없지만 알파이자 오메가인 고객이 존재한다. 상사가 주지 않는 피드백을 고객이 주고, 상사에게 깨지고 끝날 실수가 고객을 잃는 뼈아픈 경험이 되기도 한다. 나도 고객이 던진 말이 칼이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다만 이러한 좌충우돌의 과정이 프리랜서의 성장을 앞당긴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조금 더 맷집도 세진다. 몇 년 전이라면 억울해서 베갯잇을 눈물로 적셨을 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설명을 한 이후에는 몇 시간 만에 털어버리는 법을 배워 나간다. 그것이 다른 고객들의 일을 하거나 내 삶을 살아가는데 어둠의 기운을 드리우지 않도록. 다행인 점은 고객과의 관계는 프로젝트와 함께 종료되기에 오래 견디지 않아도 되고, 지나치게 비상식적으로 구는 사람은 프리랜서가 관계를 종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내 삶의 무게중심을 원하는 대로 피벗(pivot)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침 8시에 나가서 아무리 빨라도 저녁 7-8시에 들어오는 일반 직장인에게는 삶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운영하는 일은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시간과 할 일을 배분할 수 있다. 솔직히 20대의 나는 "여자에게 좋은 직업"이라는 말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내 커리어에 그다지 큰 애정도 없었으면서도 저 말은 현실에 타협하고, 그저 칼퇴근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빨리 집에 가서 저녁 준비하고 애나 보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런데 내가 아이 둘을 둔 엄마가 되어보니 그 말이 이제는 다르게 다가온다. 커리어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수많은 여자들이 출산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변화한다. 하버드/예일 로스쿨 여자 졸업생의 50% 이상이 왜 풀타임 커리어를 포기했겠는가. 성공적인 커리어 우먼이면 다르겠지 싶지만 집에 입주 아줌마를 둘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 말고는 사실 다른 직장맘들과 차이가 없더라. 회사에 있을 때 마음 한편은 집에 있는 아이에게, 집에 있을 때는 회사 생각에 마음 편히 쉬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친구들을 봤다 (쉴 시간이라도 있다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아는 동생 하나는 둘째를 낳고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프리 선언을 했다. 원래 다니던 회사에서 얻은 노하우로 작은 중소업체들이 해당 상품들을 해외에 판매할 때 필요한 승인이나 통관을 도와주는 중간 역할을 맡아 적지 않은 수입을 얻으며, 아이 둘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함께 하고, 또 본인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취미를 배워 무대에도 오를 수 있었다.


"모든 직장맘들이여, 회사를 때려치워라!"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훌륭하게 맞춰 살아가는 분들도 많다. 요즘 대기업들은 특히 여성 직원들이 빠져나가는 현상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파격적인 정책을 내걸기도 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 프리로서는 애초에 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다. 프리랜서나 창업은 무조건 완벽하다는 것도 아니다 - 제대로 시간관리가 되지 않을 경우 죽도 밥도 안될 위험도 있다. 단지 삶과 일의 균형을 맞출 수 없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이 괴로운데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조직 바깥에 답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제안을 할 뿐이다.


와튼을 나와 백수가 되었던 부끄러운 이야기는 이제 여기에서 마무리할까 한다. 사실 누군가에게 충고랍시고 하기엔 나도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도 가지 않아 그나마 평화롭던 8시부터 4시까지의 근무 루틴도 깨졌다. 온라인 수업시간이 빡빡하다 보니 나는 먹지도 않을 점심도 두 어린이(+큰 어린이 aka 남편까지)에게 시간 맞춰 차려 드려야 한다. 그래도 내 눈앞에서 공부도 하고, 투닥거리기도 하고, 사이좋게 놀기도 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행복하다고 정신승리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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