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성에 대한 환상 깨기
불확실성을 싫어했다. 본래 꾸준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살면서 그나마 꾸준히 따라온 원칙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확실성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나를 못 견디게 하는 상황은 눈앞에 너무 다양한 옵션이 존재해 도저히 뭘 골라할지 모르겠을 때. 식당 메뉴야 '늘 먹던 걸로!'를 외치면 되지만, 삶에서 중요한 단계들 - 대학과 전공을 고르고, 커리어를 정하고, 직장을 구할 때 - 은 예행연습을 해본 적이 없으니 두려웠다. 그래서 늘 가장 위험이 덜할 것 같은 길을 택했다. 졸업하고 제일 취직이 잘될 것 같은 경영학과에 갔고, 자격증 하나 따 놓으면 어딜 가든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회계사가 되었고, 더 많은 기회의 문을 열기 위해 MBA 유학도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다. 선택 장애를 가진 사람이 최대한 선택지가 많은 길만 골라 다녔으니 말이다.
하나의 정상에 도달해서 '이제 이만큼 왔으니 이제 좀 불확실성이 덜하겠지?' 생각할 때마다 여지없이 배신당했다. 다음 단계에서 펼쳐지는 불확실성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만 잘 가면 될 줄 알았거늘, 대학 가서 경영학과에 갔더니 세상의 모든 업종이라는 옵션이 펼쳐졌다. 힘들게 회계사가 되어 법인에 들어갔더니, 바로 '이건 아니다'는 촉이 왔다. 나보다 10년 오래 회사를 다닌 사람들의 삶이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파트너 승진이 아니면 퇴사의 기로에 선 많은 분들이 전전긍긍하며 매일 밤 술집으로 영업을 하러 다녔다. 바늘구멍 통과보다 어렵다는 파트너가 될 자신도 없었지만, 사실 그렇게 해서 파트너가 된 상무님도 매일 밤 술자리인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나보다 5년만 위로 올라가도 여자라고는 아예 한 명도 없었다(지금은 상황이 나아졌다고 들었다). 좋은 학교에서 MBA를 하면 좀 나아질까 미국까지 갔는데, 이번엔 아예 백수라는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확실성이라는 놈과의 술래잡기에서 딱 잡힌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때쯤에는 결혼 또한 견딜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다가왔다. 커리어는 싫으면 때려치우면 되지만, 결혼은 한번 잘못했다가는 팔자 망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안정성을 확실하게 제공할 것 같은 남자를 만나 10개월 만에 초스피드로 결혼을 했는데, 결혼 후에야 알았다. 여자가 90% 확실한 일에 대해 나머지 10% 때문에 걱정할 때, 남자는 50%만 확실하면 일단 호언장담을 하고 본다는 것을. (대반전: 그는 윤리학자다) 나만큼이나 그도 이 모든 과정이 처음이고 낯설다는 것을.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우연찮은 기회에 나에게 재미있는 일을 찾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초반 몇 년간은 내가 택한 길이 너무나 불안정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적잖은 공포가 있었다. (원래 나란 사람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습관이 있다) 동기들에 한참 못 미치는 금전적 보상, 그마저 고객이 들어오지 않으면 끊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 이렇게 푼돈으로 용돈벌이나 하다가 끊기면 오도 가도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근본적인 우려. 어릴 때 외할아버지의 사업 도산으로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란 엄마가 언제나 자기 사업을 차리고 싶어 했던 아빠에게 "사업하면 패가망신이야!"라고 말씀하는 걸 들어왔기 때문에, 회사라는 견고한 성 밖에 존재하는 나는, 태풍 속 들꽃처럼 너무 연약하고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때는 지원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2011년에는 둘째도 태어나고, 2012년에는 그나마 대도시인 필라델피아를 떠나 피츠버그라는 소도시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반경 5시간 안에 MBA를 뽑는 회사도 없거니와 아이 둘을 키우면서 직장을 찾아보기도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그저 찾은 일을 열심히 했다. 원래 9월 말 출산 예정이던 둘째가 5주나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들어간 병원에서, 아이를 다행히 순산한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노트북을 켜고, 입원 전 검토하던 에세이 작업을 완료하는 일이었다. 물론 재미도 있고 적성도 맞기에 열심히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 프리랜서의 장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큰 조직 속에 있어야만 안전하다고 믿던 시절에는 전혀 몰랐던, 그러나 직접 겪어보니 삶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는 부분들이었다. 물론 가만히 자리보전만 하고 있어도 꼬박꼬박 월급 주는 사람이 없다는 면에서 불확실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무조건 피하기보다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하니 내가 막연히 평생 두려워했던 정도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수입이 갑자기 0으로 떨어질 확률은 다니던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잘릴 가능성만큼이나 작았다. 그러자 의문이 들었다. '가만히 자리보전만 하고 있어도 꼬박꼬박 월급 주는' 직장이 아직까지 있었던가? (공무원/공기업은 논의로 하자)
큰 회사가 제공하는 안정성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업들도 생산성을 최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시대에 '자리보전만 하는 사람'은 우선 청산대상이다. 물론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미국에 비하면 쉽게 사람을 자르지 않는다. 지방의 한직으로 돌리거나, 책상을 빼 창고로 옮기는 것도 한국이니까 가능한 '일종의 배려'다. 미국에서는 '지금 당장 키 반납하고 몸만 나가라, 짐은 보안요원이 집으로 부쳐줄게'라고 가차 없이 말한다. 그리고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자리를 꼭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어차피 많지 않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월급의 의미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성장은 꿈도 꿀 수 없는 과정에서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리기 일쑤인데, 그러한 상황이 결코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소위 SKY 대학을 나오고도, 이제는 MBA까지 하고도, 40대 중후반부터 조기 퇴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제 너무 흔해져 버렸다. 여성들의 경우 (나중에 별도로 글을 꼭 쓰고 싶지만) 가정생활과의 양립에서 오는 문제도 크다. 조금 된 자료이기는 하지만 예일대학과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여자 동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40대 동문들의 절반 이하만이 풀타임 커리어를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파트타임으로만 일하거나 일하지 않는 여성이 거의 60%에 달했다. 돈 잘 버는 남편이 있어서 '일하지 않을 여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큰 조직이라는 형태가 가정이 있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유연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나는 늘 '말리는 선배'였다. '경영학과 어때요?', 'CPA 어때요?', 'S(회계) 법인 어때요?'라고 묻는 후배들에게 늘 '하지 마, 해 보니 구려'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한 후배는 '누나는 다 해놓고서 우리 더러는 하지 말라 그래요'라면서 웃었다. 그때의 나에게 누군가 자기 사업은 어떠냐고 물었다면, 당시 불확실성을 흑사병만큼이나 두려워했던 나는 대답 대신 경악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후배들에게 조직이 나를 보호해 줄 거라는 환상을 버리라고 창업이나 프리랜서를 고려해 보기를 권한다. 다음 편에는 내가 직접 경험한 프리랜서의 장점과 틈새시장을 찾아 자유롭게 꿈을 펼쳐가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