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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수유 Dec 23. 2022

지리산의 폭설, 고립 속 어둠을 채우는 Misty



 눈이 내리기 전에 아파서 다행이야

 지난주에는 둘째가, 이번주에는 첫째가 차례로 A형 독감에 걸렸다. 38도 정도로 이틀간 고열에 시달리던 둘째와 달리 첫째 건이는 아침부터 차츰 오르더니 오후 5시쯤 되자 온돈계에 40.2도가 찍혔다. 다리가 아프다는 아이의 말에 왠지 독감인 것 같아 그 길로 40분 거리에 있는 남원 시내까지 차를 달렸다. 5시 반이면 이 근처 병원들이 진료를 마친다. 한의원으로 가기에는 아이의 온도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밤부터 대설과 한파가 시작되니 조심하라는 문자가 왔다. 다행히 기온이 높아 낮에 내린 눈은 녹은 터라 도로 위로 살얼음이 밟혔다. 차창밖으로 비 같은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방은 금세 어둑해지고, "엄마, 아파." 하는 큰 아이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비가 언제 눈으로 바뀔지 알 수 없었다. 어두운 고속도로를 천천히 달려 나가는 차들의 전조등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대도시와는 달리 남원의 응급실은 한산했다. 혹시나 코로나일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판단하에 격리병실로 아이를 옮겨 검사했다. 역시나 A형 독감이었다. 아이는 주사를 두 대나 맞고 타미플루 링거를 맞은 뒤에야 고열이 차츰 잡혔다.

5시 20분에 집에서 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니 저녁 8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오는 길 고속도로에서 트럭을 많이 보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국도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곧 폭설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보에 도로에는 오고 가는 차량이 드물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달리는 가운데 뒷좌석에는 두 아들 녀석이 눈을 끔뻑거렸다. 어둠 속에서, 야생동물을 주의하라는 표지판을 지나쳤다. 표지판에는 지리산반달곰이 그려져 있었다. 종알종알 평소 수다쟁이인 두 아들 녀석은 어둠이 무서운 것일까, 나는 라디오를 켰다. 내가 좋아하는 EBS 북카페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재즈 특집인지 Ella Fitzgerald의 Misty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원래 낮 12시에 시작하는 방송인데 밤 8시면 재방송을 해주었다. 분명 낮에 아이들과 함께 방송을 들었는데, 다시 새롭게 들렸다. 어둠 속에서 눈이 비로 바뀌어 차창으로 흘러내렸고, 코끝까지 느껴지는 수증기를 뚫고 차 안 가득 Misty가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이 곡을 흥얼거렸고, 두 아들 그제야 창문을 열었다.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차갑지만 축축한 공기와 아이들의 편한 숨소리에 그제야 검고 어두운 사방이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겨울밤을 채운 묵직한 공기는 곧 쏟아질 눈을 예고라도 하듯이 더욱 아득하게 차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듯했다. 가끔 느끼지만 음악 하나로 그 전의 무드와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그렇게 어둠을 뚫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역시나 밤 사이 십 센티가 넘는 눈이 쌓였다. 이제 눈이 그치기 전까지는 고립이었다.





그렇다. 듣는다는 것은 어떤 깊은 지혜나 말재주, 따뜻한 마음 혹은 그저 침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듣는다는 것은 시간과 관련이 있다. 책에서 모모는 집도 가족도 없는 아이지만, "넘치게 풍성하게 가진 것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삶"이다. 우리가 타인의 이야기를 진짜로 듣기 위해서는 나의 시간을 멈추어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시간, 내가 살아왔던 과거의 삶에 이어져 있는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듣기 위해서 마치 영원의 시간을 함께 하는 것처럼 나의 조급한 시간표를 온전히 잊을 때 비로소 타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숲 속의 자본주의자/219p]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을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폭설과 독감으로 아이들은 학교를 이틀째 쉬었다. 올해는 유난스레 이곳에도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한다. 아이들 아침을 차려준 뒤에 나도 집 마당과 길에 쌓인 눈을 치워낸다. 십 센티도 넘게 쌓인 눈이 얼마 만인지. 산허리쯤 위치한 집이라 눈이 녹기 전까지는 자동차를 굴리지 못하니 고립도 자연스럽다. 차를 굴리지 않으니 걷기가 자연스럽고 그렇게 또 한 번 천왕봉을 바라보거나 눈이 내린 들판을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쉬어가도 될까. 나 스스로에게 물어낼 만큼 이곳에서 나는 혹자의 말처럼 시간이 삶인 시간을 자연스럽게 보내고 있다. 이곳에 정착한 뒤 아이도 나도 적응하느라 여러 계절을 보내느라 마음을 쓰기도 했다. 이제야 여러 잡념이 뒤섞이지 않고 멍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곳까지 넘어오기 전 나는 어떤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몰아세우고 끝까지 달리다가 숨이 가빠 왔다. 그러면 더러 몸으로 마음으로 생채기가 나는 듯했다. 20대 때는 스물아홉을 앞두고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그런 나를 이끌고 떠났다. 이제 다시 십 년을 달려 이곳 지리산까지 오게 되었다. 십 년에 한 번씩 꼭 병처럼 이렇게 떠나오는 것은 아마도 나의 그런 습성 때문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주어진 황금기, 이곳까지 떠나 오기까지 나는 아마도 책의 말처럼 "나의 조급한 시간표를 온전히 잊을 때"의 순간을 지극히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곳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식으로 앞으로의 나의 '습'이 생채기가 덜 나는 삶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온전한 내가 될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내면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나와 관계 맺는 타인과 타인의 세계에도 자유롭고 싶다. 그것이 이곳을 굴러 들어온 이유이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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