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쯤 복수의 칼을 품고 산다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by 박독수


인간만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동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인간만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도 소용없다.

인간 스스로 아무리 위대하다고 자부해도

기생충이나 세균 같은 미물들처럼 죽음을 피할 도리가 없다.

생각은, 사유는 때로 부질없고 헛된 것이다.


부질없는 일이긴 하지만,

인간이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되는 때는 아무래도 죽음에 가까워진 시간일 것이다.

많이 늙었거나, 중병에 걸렸거나,

사형선고를 받았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죽음이 문 밖에 서 있음을 미리 아는 수도 있고,

때로는 현실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스스로 죽음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런 죽음을 맞이할 때, 인간은 크게 저항하지 않는다. 발버둥치지 않는다.

산 자 들에게는 충격일 수 있으나 죽는 자들은 오히려 담담하다.


하지만 준비 없이 죽음과 맞닥뜨린다면 어떨까?

한 상에 둘러앉아 단란하게 밥을 먹는 식구들 앞에 급작스럽게 ‘죽음’의 사자가 나타난다면,

당신은 놀라긴 하겠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물리치거나 달아나려 할 것이다.

살만큼 살았고, 수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며 벌 받을 짓도 많이 했으니,

이제 나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항변하겠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죽음의 사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제는 신을 만나러 가야 할 때.”라고.

신조차 아직 당신을 부르지 않았지만,

당신은 불의의 심판자에 의해 죗값을 치르며 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화 속에서 멕시코의 전직 검사였던 알렉한드로(Benicio Del Toro)는 암살자가 되어

처절한 복수극을 벌인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멕시코 마약 조직 소노라 카르텔의 보스 알라르콘에게 딸과 아내를 잃은 알렉한드로가

마침내 원수에게 총구를 겨누며

“이제는 신을 만나러 가야 할 때”임을 알리는 장면이다.


알라르콘은 자기와 가족의 죽음을 예견했을까?

예견은 못했지만 받아들였을까? 아니다.

남의 목숨을 수도 없이 빼앗아 온 그이지만,

그 역시 난데없이 나타난 복수의 총구 앞에서 끝까지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나 타인의 죽음, 아픔은 깃털처럼 가볍고,

나의 죽음, 아픔은 바위처럼 무겁다.

죽음의 무게는 너무나 다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딜레마이자 비극이다.

착하든 악하든 상관없다. 인간은 그 본성상 이기적이다.


영화의 제목인 '시카리오(Sicario)'는 기독교 성경에 등장한다.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으러 온 반대파의 귀를 단검으로 내리치는데,

이 단검이 ‘시카’이며, ‘시카리오’는 ‘단검을 쓰는 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시카리오의 스승인 예수는 죽음 앞에서 결코

“지금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외치지 않았으며,

그의 사후 제자들 역시 복수의 칼을 갈지는 않았다.

로마와 그 부역 세력의 부당한 통치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질서를 뒤엎어 유대의 독립을 꾀하지도 않았다.

예수와 그 제자들의 죽음은 로마이든, 유대 기득권 세력이든,

혹은 그에 반대하는 세력이든,

공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살인과 폭력의 부당성,

자신의 이익과 신념을 위해 남의 목숨조차 빼앗으려는 인간의 이기심을 폭로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CIA 요원 케이트(Emily Blunt)는 교과서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작전의 총책임자인 맷(Josh Brolin)과 복수의 화신 알렉한드로(Benicio Del Toro)에게

멕시코 소노라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 방식이 부당하다며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는 공권력은 언제나 정당하며,

악에 대해서조차 법에서 정한 대로 대처해야 한다고 교육받았고 또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책을 벗어난 현장에서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매우 무기력하게 그려진다.

자신을 총으로 위협해 억지로 서명을 받아간 알렉한드로를 향해서 끝내 총을 쏘지 못한다.


반면에 알렉한드로는 멕시코든, 미국이든, 국가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부당성,

무기력함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한때 검사였지만 법에 따라 악을 응징한다는 게 얼마나 헛된 기대인가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깨달은 그다.

악은 절차와 정당성을 따지는 케이트 같은 공권력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알렉한드로 같은 개인의 복수에 의해 응징됨을 이 영화는 다시 보여주고 있다.


(이런 메시지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마동석 주연 <악인전>이다.)




우리는 사회 혹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

대개는 이 공동체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 기대하며 살아가(야하)지만,

가끔씩 어떤 경험들은 이 기대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군대나 경찰을 생각해보자. 시민을 학살하는 5.18 당시의 한국군이나,

현재의 미얀마 군부는 나를 지켜주고 있는가?

일제시대, 독재정권 시절의 경찰이나 검찰은 항상 객관적인 잣대로 범죄를 소탕했는가?

우리가 너무 많은 영화에 의식화된 나머지 과도한 불신이 쌓인 탓일까?

아니다. 언제나 영화는 현실의 절반도 담아내지 못한다.

사회 혹은 공동체를 보호하고 질서를 지켜낸다는 군경에 대한 이런 불신은

곧바로 정부 혹은 지배층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흔하게 목도하는 일이지만, 부당하고 폭압적인 지배층이 영화를 감시하는 것은

영화는 진실을 말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한드로와 케이트는 바로 이 점에서 대척점에 서 있다.

암살자 알렉한드로가 맞서 싸우는 대상은 ‘악의 화신’에 다름없다.

멕시코 정부라는 공권력조차 어찌할 수 없는,

아니 때로는 정부보다 위에 서 있는 마약 카르텔 조직들은 어떠한 악행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정의의 수호자 CIA의 요원인 케이트는

그런 악조차도 공권력이 정한 절차에 따라 다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 영화는 그런 믿음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헛된 것인가를 케이트를 통해 잘 보여준다.


왜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는가?

‘이에는 이’라고 악에 대해서는 더 지독한 악으로 복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영화는 이런 우리들 내면의 문제의식에 대해 “그렇다. 당신 생각이 맞다.”라고 확인해준다.

바로 이 점이 통쾌하게 와 닿으며, 우리는 수많은 사적 복수극에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제도권 교육을 받은 우리들은 겉으로는 공권력과 법질서를 존중하는 케이트처럼 보이지만,

살아가면서 겪거나 알게 되는 수많은 부조리와 불공정의 사례들은

우리 내면 속으로 잠입한 알렉한드로를 불러내, 피도 눈물도 없는 복수의 총탄을 발사한다.

지금 이 순간도 어찌할 수 없는 저 거대한 ‘악’에게 누구라도 속삭이듯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이제는 신을 만나러 가야 할 때다.”


게다가 알렉한드로를 연기한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쿠바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를 연기한 델 토로 아니던가?

할리우드 액션물에 신물이 난 우리로서는 전혀 다르고 신선한 새 인물의 선 굵은 연기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1편에 이어 얼마 안 있어 2편 데이오브솔다도를 만나게 된 것은 델 토로의 팬으로서는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를 만날 수 있는 영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실망한 적이 없다.

이제는 반대로 그가 극악한 살인자로 나오는 <파라다이스 로스트>를 조만간 볼 것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p.s. 최근에 <유쥬얼 서스펙트>(브라이언 싱어, 1995)를 다시 찾아 보다가,

델토로가 용의자 중 한 명인 프레드 펜스터로 출연했음을 알았다.

반가웠다. 마치 <쉰들러 리스트>의 리암 니슨이

<미션>의 초반부에서 젊은 신부로 나오는 걸 발견했을 때처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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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글 정원 주소입니다. 잘 가꾸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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