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의 산중남녀
1.
배터리를 손보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오종우의 디젤차는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역시
기온이 떨어지자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템플 스테이 마지막 날,
오종우는 광주에서 늦게 퇴근하는 안상은을 픽업해 서울로 갈 예정이었다.
맑은 하늘에 달이 떴지만, 초겨울의 밤, 산 주변의 추위는 생각보다 매서웠다.
그는 많지 않은 짐을 트렁크에 싣고 운전석에 앉은 채,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곧 가장 가까운 협력업체에서 연락이 갈 것이라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오종우가 안상은과의 통화를 마치고, 다시 보험회사에 연락을 하려고 할 때,
드디어 낯선 전화번호가 떴다. 늙수그레한 목소리였다.
"고객님, 여그가 시골이지라이, 고객님은 별거 아니라 생각해도,
여그서는 보름날 밤에는 그 절 근방으로는 차를 절대루 안 가져간당게요.
옛날부터 들어온 이야그도 있고, 또 지도 직접 겪어봤지만,
딱 보름날 밤이면 그 짝에서 차 사고 난 게 일 년에 서 너 건이나 된당게요.
출동 서비스 차가 계곡에서 굴러갖고 엄청 크게 망가지고, 운전사도 식물인간이 되었당게요.
지뿐 아니라 다른 업체에서도 안 갈거구만요.
웬만하시면, 절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보면 안 될까요?"
어이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출동서비스를 거부하다니...
보험회사와 다시 연락 주고받기를 몇 차례,
자기들끼리 짜기라도 한 듯 보험사와 연계된 A/S업체들은
미신이나 다를 바 없는 이유를 대며 출동을 거절했다.
템플 스테이에서 얻었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평화가
몇 시간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마지막 통화 후에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오종우는 차 안에서 스르륵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오종우는 한기에 잠을 깼다.
차는 일주문에서도 한 참 떨어진 주차장에 있었지만,
일주문 못 미처 양쪽으로,
네모진 경계석 안에 마주 서있는 두 개의 돌장승과는 아주 가까웠다.
게다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보름달이 떠서,
차 유리창 너머로도 근방의 사물들이 비교적 잘 보였다.
그런데 추위와 함께 깊어가는 이 밤에,
저 멀리 일주문을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이 보였다
뒷모습이었지만, 하나는 흰 옷에 상투를 틀어 올린 남자,
다른 하나는 승복 차림에 머리카락이 없는, 그러나 가냘픈 몸매로 보아 여자임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춥거나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손을 꼭 잡고
달빛 아래 좁은 길을 나란히 걸어서 일주문을 지나 절 안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오종우는 차에서 내려
절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러자 이 번에는 달 빛 아래 남녀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템플 스테이 삼일 동안 수십 번이나 오가며 보았던,
네모진 경계석 안의 돌장승 두 개가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혹시 오늘 오후에라도 갑자기 철거된 것일까?
그럴 리는 없는데, 오종우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두려 할 때,
왼쪽의 야트막한 산비탈에서 우둥퉁퉁 소리를 내며
굵은 기둥 같은 나무토막 서 너 개가 한꺼번에 굴러왔다.
나무토막들은 놀란 오종우가 죽기 살기로 달려 오른쪽 계곡으로 피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굴러오다 연속으로 물속으로 빠졌다.
오종우가 숨을 헐떡이다 고개를 들어 다시 절 쪽을 올려다보니,
산비탈의 어둑어둑한 나무 덤불숲에 작은 횃불 같은 두 개의 빛이 뚜렷했다.
깜빡이는 두 개의 불빛은 오남우 쪽을 한참 동안이나 향해있다가
한 바퀴를 휘-익 돌며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른 아침부터 어림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추위에 밤새 차에서 떨었다고는 해도,
달밤에 남녀가 절로 사라졌다는 둥, 멀쩡히 서 있는 돌장승이 간 밤에 갑자기 사라졌다는 둥,
오종우는 자기 입으로 떠들면서도 스스로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싶었다.
템플 스테이를 담당했던 젊은 스님은
오종우의 두서없는 말을 끝까지 다 듣고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스님, 저도 시골에 오니까 시골 사람이 되는가 봅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겪다니..."
오종우가 스님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긴급출동 A/S 기사가 도착해서
자동차에 시동이 걸렸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기사는
어찌 됐든 하룻밤을 지체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스님이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왔다.
오종우에게 피곤할 테니 중간에 쉬엄쉬엄 가면서 읽으라고 몇 장의 종이를 줬다.
"우리 절의 공식 문서는 아니라는데, 선배 스님이 한 번 읽어보시라고 합니다."
호남고속도로 정읍 휴게소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오종우는
조수석에 놓아둔 종이를 집어 들었다.
책이라고는 할 수 없는, 큰 글자로 타이핑한 문서 몇 장이었다.
2.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막 시작되던 때,
세상이 바뀌었다 해도 백성들은 여전히 탐관오리와 토호, 잦은 기근과 홍수,
반복되는 흉년과 역병으로 지옥과 다름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이광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는 먼 친척으로,
그는 새로운 조선의 신하였지만, 사라진 고려의 신하이기도 했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왕조 교체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혁명이라는 것이 고작해야 지배층의 교체일뿐,
백성들의 삶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며 고민했다.
그는 결국 벼슬을 버리고 고승들의 사찰을 찾아 설법을 들으며 공허한 마음을 달래고자 했다.
그러나 새로운 권력층인 사대부들의 억불숭유 논의가 공공연해지자,
사찰들은 하나, 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고,
불도를 닦는 승려들은 애써 이름을 숨기며 수행에만 전념하고자 했다.
그럴수록 이광남의 구도는 간절해졌다. 그는 더 먼 곳으로, 더 깊은 산속으로,
이름 없는 승려들을 찾아다녔다.
그는 부처님만큼이나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스님을 몇 분이나 만났다.
어떤 스님은 그에게 달마대사의 말을 전하였다.
“부처는 멀리 있지 않네. 그대의 마음이 곧 부처일세.”
이광남은 머리를 숙였으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마음이 곧 부처라면, 왜 이 가슴은 날마다 피를 토하듯 요동치는가?
굶주린 백성의 울음도 내 마음이란 말인가? ”
또 다른 절에서는, 젊은 선승이 임제의 가르침을 내뱉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거든 조사도 죽여라.”
이광남은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차라리 옥좌에 앉은 왕을 죽이라 말했더라면 내 가슴이 뜨겁게 뛰었으리라. 그러나 부처를 죽이라니… ”
마지막으로 조주 선사의 화두를 들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이광남은 절 마당에 침을 뱉으며 울부짖었다.
“없는 것이구나. 다 없구나. 없는 세상에서, 고통도 없고 구원도 없다 말하는구나.
허나 저기 길가에 널브러진 시신들은 분명 내 눈앞에 있지 않은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