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의 유통기한
시립 도서관 서가 한 쪽이 옛날 시집들로 빼곡하다.
단순히 시를 모아놓아서가 아니라,
시가 들어가 산다는 의미에서 시집은 '시의 집'이기도 하다.
또한 시는 '말의 절'(言+寺)이니, 집 속에 또 집이다.
이 서가에 서면 어릴 적 뛰놀던 골목길에 선 느낌이다.
닫힌 대문을 밀듯 시집을 펼치면,
낯설기도 하고 낯익기도 한 유물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빈 헛간, 낡은 키, 흙마당, 싸리 빗자루, 우물가에 두레박, 장독대, 항아리, 빨래줄, 바지랑대,
툇마루, 처마, 섬돌, 다듬이, 호롱불, 질화로....
한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생활 속 물건과 풍경이다.
옛 시인들은 보통 사람들이 스쳐지나는 것들을 단초 삼아 아름다운 시를 썼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것들과 쉽게 만날 수 없다.
장독대는 냉장고나 아파트 베란다 위의 플라스틱 통으로 대체되었고,
우물은 아주 오래 전에 메워져 아스팔트 아래 묻혔다.
골목과 마당은 사라지고 픽업존이나 커뮤니티센터 혹은 늘 차로 가득한 주차장 뿐이다.
빨래터는 커녕 빨래줄도, 빨랫줄에 나부끼던 아기의 기저귀도
이제는 기억 속, 그것도 나이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박목월이 “장독대에 달이 뜨고 / 우물가에 별이 뜨고”라 했을 때,
그 장독대 위 달빛과 우물가 별빛을 받아 반짝이던 감성은 우리에게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손끝에 느껴지던 흙덩어리와 나무의 질감, 시냇물과 햇빛의 투명함은 사라지고,
우리는 그 낡은 '시어'들의 의미를 어림짐작으로 더듬어 볼 뿐이다.
마치 박물관에서 오래된 토기와 장신구를 보고, 용도와 쓰임새를 추측하는 관람객처럼,
우리는 사전이나 해설 없이는 그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감상할 수도 없다.
많은 단어들이 어디 민속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골동품에 가깝다.
심지어는 외국어처럼 들리는 죽은말도 더러 보인다.
정지용의〈향수〉속 실개천, 울타리, 감자꽃, 외양간이 대표적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누구나 알던 농촌의 생활과 풍경이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들을 쉽게 만날 수 없다.
'개천?' 개천은 대부분 복개되어 도로가 된 지 오래다.
거기에 실개천이라니...'실'은 뭐지?
우리 주위에는 아스팔트 배수구, 철제 난간, 콘크리트 건물과 획일적으로 심겨진 조경수만이 남아 있다.
시어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본 적이 없으므로 공감할 수도 없다.
그리고 하나 더,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상상력조차 메말라가고 있다.
김동환의 시 <산너머 남촌에는>을 읽으면,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검색하고,
맛집에 가기 전에 후기를 읽고, 먼 곳에 가기 전에 내비를 켠다.
미지의 세계는 점점 줄어들고, 너무 많은 사람들 속에서 피로를 느낀다.
무엇을 경험하기 전에도 이미 결과를 알고, 무엇을 느끼기 전에도 이미 판단한다.
누가 더 이상 오감을 동원해
쓸모없는 상상과 어림짐작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겠는가?
두레박 소리를 떠올리며, 장독대 위 달빛과 우물가 별빛을 상상하던 일은
이제 귀찮고, 불필요한 노동이 되어버렸다.
윤동주의 <자화상>을 읽는다.
사나이도 있고, 달도 별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사나이와 달과 별이 저 깊은 곳에서 마주치던 우물은 이제 더 이상 없다.
우물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이 시는 아무 의미나 감흥이 없다.
흔히 말하는 '울림'이나 떨림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들여다보며 성찰하는 자화상보다는,
자랑하고, 과시하고, 비교하며, 경쟁하는 '프사' 찍기에 바쁘다.
기억할 필요도, 상상할 이유도 없어진 세상
우물, 장독대, 빨래줄, 마당, 골목 등은 그냥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시적 감수성의 자극제, 소통의 매개체였다.
한 가지 사물의 표정, 느낌, 온도, 질감, 냄새 등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너와 나의 감성을 연결해 주던 끈이었다.
그 끈, 그러니까 시를 시로서 살아 있게 만들던 매개체가 사라지자,
시는 홀로 남아 암호가 된다.
우리는 시를 읽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공감은 끊기고, 시는 박물관 속 유물처럼, 설명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 된다.
설명과 해석이라...
꽃의 그림은 보되, 꽃의 향기와 꽃을 스치는 바람까지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단절과 상실 속에서도 시는 묻는다.
과거의 장독대와 우물, 빨래줄과 마당은 사라진 자리,
그 자리에 오늘의 아파트 베란다, 스마트폰, 엘리베이터, 편의점, 자동차,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도어락 등이 들어서 있다.
과연 이 장소와 사물들로 감성의 집, 언어의 집을 다시 지을 수 있을까?
아이돌, 카톡, SNS, 인터넷, AI 라는 말들이 시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 집은 대체 어떤 집일까? 우리는 그 집에서 어떤 감성을 키울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감성이 만들어 낸 것초자도 다시 시간이 지나면 이해될 수 있을까?
아마도 미래의 독자는 또 우리처럼 어림짐작만 하게 될 것이다.
그들 역시 관광지의 짧은 안내문을 보는 여행자처럼,
시를 시로 느끼지 못하는 둔감한 감각 앞에서 불통의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감수성과 상상력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짧은 것인가?
나는 지금 시대의 급변이라는 지진이 만들어 낸 거대한 단절 앞에 망연자실 서있다.
나는 이 시대와 저 시대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드넓은 공허 속에서
차안과 피안의 격절감이 빚어내는 거대한 협곡 앞에서
오래된 풍경과 사라진 상상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나의 이 빛바랜 감성마저도
잠깐 출렁이다 길게, 혹은 영원히 잠잠할 것이다.
마치 "큰 독 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정지용의 시 한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