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이 아니라 장승 아래
나주시 다도면에 불회사라는 절이 있다.
불회사는 백제 때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고찰이었지만
큰 전란 때마다 불타서 다시 짓기를 수차례 거듭했다.
이광남이 고승들의 설법 듣기를 그만두고, 고향 근처 영암에 있는 옛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도
불회사 터는 여전히 잿더미의 폐허로 있었다.
친구가 물었다.
"여전히 혼인에는 뜻이 없는가?
백성들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옛사랑의 수렁에 빠져 부처를 붙잡으려는 게 아닌가?
친구는 대답 없는 이광남에게,
불회사 터 한 구석에 흙으로 움막을 짓고 사는
원진이라는 스님이 있으니, 한 번 만나보라고 권했다.
이광남은 거절했다.
알듯 말듯한 설법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했던 자신의 아둔한 모습이 한심했고,
자기는 아무리 훌륭한 스승을 만나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친구는 정말 마지막으로 만나보기를 강권했다.
그러나 이광남은 움막 승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단 한마디,
“개라면 몰라도, 너 같은 자에게 들려줄 법이 없다.”
움막 승의 그 한 마디가 이광남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스스로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지체 높았던 그가 일개 중에게 면박을 당한 것은 난생처음이다.
그는 어쩌면 이 움막 승이야 말로 자기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깨달음의 스승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번의 방문에도 움막 승의 문전박대가 변함없자,
이광남은 마침내 움막 아래, 불회사로 가는 길목 어귀에 초막을 지었다.
초막에 기거하며 매일 아침마다 움막을 찾아 지독한 저주와 독설을 듣고 나서야
그는 편안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초막에는 불 탄 자리일망정 부처님을 만나보고자 하는 백성들이 잠깐씩 들러 쉬어갔다.
그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어 불회사 터만이라도 밟아보려다가
두문불출하는 초라한 움막 승의 거처 앞에 멈춰 눈물을 닦으며 돌아서야 했다.
이광남은 허탈한 모습의 그들에게 사연을 묻기 시작했다.
그는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몹시 굶주린 듯하면 음식을 같이 나누기도 했다.
백성들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요, 그 고통은 칼에 살을 베는 듯 아팠지만,
이광남은 무거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귀를 기울여주는 이광남을 별난 선비, 끄덕 양반이라 부르며 자주 찾아왔다.
백성 중의 누군가는 언젠가는 부처님 대신에 호랑이가 나타나 못된 양반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라며,
그때 이광남은 좋은 양반이라고 자기가 증언하겠노라고 다짐을 하기도 했다.
이광남이 잠 못 이루던 어느 날 밤,
초막 마당에 기골이 장대한 한 사내가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광남은 급히 그를 안으로 끌고 들여와 상처가 나을 때까지 정성껏 돌보았다.
그의 초막에까지 관군들이 조사를 나왔지만,
서슬 퍼런 양반 이광남의 기세에 발조차 들이지 못했다.
사내가 기운을 차리자 이광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토록 양반만을 쳐 죽이고자 했거늘, 이 호랭이가 양반 손에 살다니..."
호랭이는 호남 일대 양반들의 재산과 목숨을 뺏는 도적 무리의 두목이었다.
얼마 더 지나 호랭이가 이광남의 초막을 떠날 때 말했다.
"당신은 보기 드문 양반이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나를 살린 것만으로는 양반의 죄를 다 씻을 수 없소.
당신이 죗값을 다 치르도록 내가 기회를 주리다."
이광남이 여느 때처럼 움막 승에게 박대를 당하고 돌아왔을 때,
초막 마당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이광남에게 자초지종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인은 경상도에 사는 김철이라는 거상의 외동딸이다.
여인은 스무 살이 채 안 되어 무안 명문가인 민 씨의 아들과 혼인했는데
자식도 없이 몇 년이 지난 후에 남편이 급사했다.
시어머니는 민 씨의 집안이 열녀효부로 이름난 전통이 있으니,
자결하여 이름을 빛내라 강요했다.
마침 민 씨 집안의 악행을 벌하려던 도적의 염탐꾼이 이 얘기를 호랭이에게 알렸고,
호랭이는 여인을 보쌈하여 피신시킨 후 며칠 만에
민 씨 집을 불태우고 일가친지를 모두 죽였다.
호랭이가 여인을 이광남에게 보내며 그를 지아비로 섬기라 했다.
이광남은 호랭이의 뜻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선뜻 여인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는 며칠의 고민 끝에, 여인을 움막으로 데려갔다.
움막 승에게 그가 소리쳐 말했다.
"내가 스님의 움막 옆에 초막을 하나 더 지을 것이니,
나보다 먼저 이 여인을 부처님 앞으로 이끌어 주시요."
여인은 밤에는 움막 승 곁의 초막에서 자고, 낮에는 이광남의 초막에서 지냈다.
이 무렵, 이 일대에 역질이 돌았다.
역질이 들면 병자는 물론이고, 식구들, 가까운 이웃들까지 보균자로 몰려 관군에게 끌려가 죽었다.
백성들은 관군을 피해, 잿더미가 된 불회사 터에 움막을 짓고 살았지만,
역병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홀로 염불만 외던 움막 승은 백성들의 통곡소리에 결국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움막 승은 죽음이 있는 곳마다 찾아가 극락왕생을 빌어주었다.
얼마동안은 도적 두목 호랭이가 식량을 갖다 주고, 이광남과 여인이 함께 구휼에 힘썼으나,
알음알음으로 몰려드는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 여인은 호랭이가 초막에 찾아와 이광남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호랭이가 따지듯 물었다.
"왜 여인을 거두지 않는 것이요? 부처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자가 왜 그리 박절하오?"
"나는 이제부터 도적이 될 것이요. 도적이 되어 더 많은 백성을 구할 것이요.
여인을 도적의 부인으로 만들 수는 없소.
역질이 다 물러가고, 이 불회사 터의 움막 대신 법당이 들어서는 것이 나의 소원이요."
"도적은 나 하나로 족하오. 백성을 구하는 것은 당신의 능력 밖이요.
한 여인을 거두는 것만으로 당신의 죗값은 다 갚을 수 있소."
"미안하오만, 내가 사랑한 여인은 모두 죽었소. 어머니, 누이와 또 어떤 여인이 죽었소.
저 여인마저 또 죽일 수는 없소."
곡식이 바닥나 구휼이 어려워지자 여인은
집을 떠난 지 수년만에 처음으로 경상도의 친정 부모님 집으로 가서 쌀을 청하였다.
그의 아버지 김철은 죽었던 딸이 돌아와 기뻤지만, 딸의 간절한 요청은 거절했다.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온 여인은 호랭이를 찾아가 말했다.
"내 아버지가 경상도에서 손안에 드는 거상이니,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오.
호랑이가 직접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했다.
“선택하시오.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겠는가, 절에 시주하겠는가, 아니면 나에게 바치겠는가.”
김철은 다 같은 말이라 생각하여 갖고 있던 재물과 곡식을 절에 시주하였다.
그것으로 백성 구휼은 물론 불회사를 다시 짓기에도 충분했다.
불회사가 거의 다 지어질 무렵, 움막을 벗어나 법당에 앉은 움막 승이 여인에게 말했다.
"너의 마음은 부처님에게 있지 않고 늘 저 아래 초막에 가 있구나.
너를 더는 여기에 둘 수 없으니 초막으로 당장 떠나라."
여인은 절에서 쫓겨나 이광남의 초막 근처를 떠돌다 덕룡산의 낭떠러지에서 크게 다쳤다.
천만다행으로 호랭이의 수하들이 여인을 발견해 이광남의 초막으로 데려왔으나 가망이 없었다.
"이렇게 내가 죽게 되니, 선비님이 나를 사랑한 것입니까?"
이광남이 말대신 눈물을 흘리자, 여인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
“죽어서라도 선비님 곁에 있고 싶어요.
멀리 두지 마시고, 한 달에 한 번, 보름날에 부부의 연을 맺게 해 주셔요.”
이광남은 여인을 초막 마당에 묻었다.
불회사가 다시 세워진 후에도 웬일인지 백성들은 법당이 아니라
이광남의 초막에 들러 하소연했다.
번듯한 법당에 양반과 부자들의 행차가 잦아지자, 평범한 백성들은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이광남은 너무나 분한 나머지 화병이 들었고, 이듬해 초막에서 쓸쓸히 죽었다.
호랭이가 초막을 헐고 먼저 죽은 여인의 묘 맞은편에 그를 묻었다.
두 사람의 무덤에는 묘석 대신 커다란 돌 두 개를 세워두었는데,
백성들은 이광남이 죽은 후에도 돌 아래까지 찾아와 넋두리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던 돌에
각각 선비와 여인의 형상이 돋아났다.
움막 승 원진이 죽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청간국사의 시호를 내리고,
사찰에서는 묘탑을 만들어 세웠으나
불회사를 들고나는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마주 선 돌장승 아래에 와서야 비로소
가장 자기에게 가까운 부처의 얼굴을 발견한다.
3.
광주 시내로 들어서자 전대 교차로에 안상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그녀를 발견하고 나서야, 오종우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차에 올라탄 안상은은 어제 늦게까지 근무하게 된 사정이며,
이래저래 속상하다며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명랑하고, 사랑스러웠지만,
오종우는 어젯밤 절에서의 기묘한 체험과 전설이 자꾸 떠오르며,
마치 다른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오종우는 상의 안주머니에 접어놓은 종이를 꺼낼까 하다가
그만두고 혼자 웃으며 속으로 말했다.
“아마 미친 소리, 헛소리라고 할 테지?”
결국 그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대신에 보름달이 맑게 뜨는 어느 날, 안상은과 함께 불회사에 가리라.
달빛 아래 일주문을 지나던 돌장승 남녀처럼
그들도 손 꼭 잡고
언제나 푸르른 비자나무 숲을 지나 동백나무 우거진 곳까지 이르리라 다짐했다.(끝)
* 저의 글 정원 주소입니다. 잘 가꾸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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