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랜토리노>(Clint Eastwood, 2008)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30년생 95세다. 100세까지, 100세를 넘어 그의 만수무강을 빈다
영화 <그랜 토리노>는 주인공 월트의 부인 도로시의 장례식으로 시작해 월트 본인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도로시의 장례식 뒤풀이와 바로 옆 집 몽족 아기의 생일잔치는 같은 시간에 이루어지고,
월트는 자신의 생일에 그의 자식들이 아닌 몽족에 초대되어 음식을 먹는다.
도로시의 장례식을 집전한 27살 풋내기 신부는 월트와 함께 삶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신부는 월트의 고해성사, 즉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살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만,
인생의 황혼 길에 선 초라한 노인, 잘못 살아온 인생에 대한 자각과 회한에 빠진 월트는
이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더 많이 생각한다.
영화 <그랜토리노>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는 이렇게 바라보고자 한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혹시 다 하지 못한 숙제는 없는가?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그 숙제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갈 것인가?
<성조기 – 전쟁은 끝나도 전투는 계속된다>
백인 노인 월트 코왈스키는 미국인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워 훈장도 받았다.
그의 자부심은 늘 집 앞 현관에서 펄럭이는 성조기를 통해 드러난다.
그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지만, 그의 삶 곳곳에서 전투는 이어지고 있다.
그는 아내의 장례식 날에도 풋내기 신부와 논쟁하며,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와 매사에서 부딪힌다.
이웃집 할머니와 침 뱉기 싸움을 하며, 단골 이발사와도 험악한 말을 주고받는다.
흑인들에게도 대놓고 ‘검둥이(Nigger)’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그렇듯, 월트는 도도한 변화의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과거부터 그가 신봉했던 가치와 취향들을 움켜잡은 채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하지만 보다 심각한 전투는 그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에게는 깊은 트라우마가 있다.
한국전쟁에서 항복하려는 소년병을 쏘아 죽인 것이다.
몽족의 무당은 이것을 ‘실수’쯤으로 표현했지만, 월트는 그것을 씻을 수 없는 죄라 여긴다.
그가 전투의 공로로 탄 훈장은 그 죄를 환기시킬 뿐이므로 지하 창고에 처박혀 있다.
전쟁과 살인의 정당성에 대한 혼란은 베트남 전쟁으로까지 확대된다.
수와 타오 같은 몽족들이 베트남전에서 미군 편을 들었다가
미군 철수 후에 살해와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 온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월트는 당황하고 흔들린다. 월트는 이 낯선 이민족에게 마음의 빗장을 푼다.
<자랑할 것 없는 삶에 대한 자각>
현관에 걸린 성조기는 아직 살아있다는 과시이자 허세일뿐, 사실 그는 실패자와 다름없다.
그의 이런 자각은 아내 도로시의 죽음 이후 두드러진다.
도로시는 영화에 전혀 나오지 않지만, 월트가 아내에게 크게 의존했음은 곳곳에서 알 수 있다.
아내 없는 노인에게는 자식뿐인데, 가까이서 본 자식들의 모습은 큰 실망과 때로 분노를 일으킨다.
큰 아들은 일본 기업을 위해 일하며 일본제 차를 타고 다닌다.
아들 부부는 월트의 집을 팔아치우려고 온갖 감언이설로 그를 요양원에 보내려 한다.
사소한 일에도 아버지를 이용하려 할 뿐, 진심으로 돌보고 보살피려는 데는 관심이 없다.
손녀는 대놓고 싹수가 없다. 월트의 표현대로 ‘콩가루 가족’이다.(주 1)
가족 대신에 이웃이 있을까? 있다. 그러나 반갑지 않은 이웃이다.
월트가 사는 동네는 어느 사이 이민족들에 의해 점령되고 있다.
그의 집 주변은 흑인과 동양인들로 넘쳐난다.
꼭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백인들끼리 어울려 살던 동네는 사라졌다.
그의 주치의조차 경륜 많은 백인 남자에서 젊은 중국인 여자로 바뀌었다.
어느 날 그의 옆집으로 ‘야만인’들이 이사 오더니, 그 집 마당에서 잡초가 넘어오고,
급기야는 사람들이 넘어오고, 종국에는 야만인들과의 엮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집 현관에 성조기는 여전히 휘날리지만,
미국산 차도, 백인들도, 그의 전성기도 이제는 옛일이 되었다.
하루하루 전투를 치르듯 살았지만, 그는 이렇다 할 만하게 지키거나 이룬 게 없다.
그가 애써 지키려 했던 대부분의 것들은 사라지거나 망가졌다.
그의 미국에 대한 자부심은 토요다에 밀려나는 포드자동차를 통해,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에 의해 근거가 무너지고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아직 쓸 만하다 여겼던 자기 몸조차 매우 위중한 상태임을 알게 된다.
한마디로 그는 헛살았음을 알게 된다. 월트는 실패자다.(계속)
(주 1) 생물학적 가족의 허구성을 고발한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또 다른 영화는 <밀리언달러베이비>다.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 매기의 가족은 그녀의 꿈과 고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이 오직 그녀의 재산에만 관심을 가질 때,
진정한 혈육 즉 모쿠슈라가 되어 준 사람은 트레이너 프랭키다.
생물학적 가족이야 말로 진정한 가족이라는 신화를 강요할 때,
그것이 얼마나 인간성을 말살하며 파탄으로 내모는지를 많은 영화들이 고발하고 있다.
최근 영화로는 <어느 가족>(Koreeda Hirokazu, 2018)과
<가버나움>(Nadine Labaki, 2018)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