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멋있는 최후는 없다(하)

영화 <그랜토리노>(Clint Eastwood, 2008)

by 박독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30년생 95세다. 100세까지, 100세를 넘어 그의 만수무강을 빈다



<월트의 마지막 전쟁 – 죄를 씻다>


백인들을 밀어내고 바로 옆 집으로 이사 온 야만인 이웃.

울타리라는 공간적 경계를 먼저 넘어온 것은 몽족 ‘수’와 ‘타오’ 남매이지만,

그들 사이의 사회적, 심리적 경계를 먼저 넘어간 것은 월트다.

월트는 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무지와 편견을 발견하고는 이를 몰아내려 싸운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의도치 않게 목격하지만, 더 이상 남의 일로만 보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개를 잡아먹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추상적 집합체로서의 동양인

혹은 야만인들이 아니라, 미국 편을 들었다가 고향에서 쫓겨난 불쌍한 족속,

갱단과 흑인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남매,

착하기만 할 뿐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한 소년의 구체적 삶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월트의 내면에서 백인과 몽족의 경계는 무너지고, 그들은 월트와 동등한 인간이 된다.


%EB%8B%A4%EC%A4%91%EA%B5%AD%EB%86%88%EB%93%A4.JPG?type=w773 무지와 편견은 자주 혐오로 이어진다. 동양인은 다 중국인으로 보는 월트


%EB%AA%BD%EC%9D%80%EC%96%B4%EB%94%94.JPG?type=w773 몽족 소녀 '수'를 통해 자신의 무지와 편견을 깨달아 가는 월트


타오의 얼굴에서 자신이 죽인 소년병을 떠올리는 월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타오 남매를 습격한 몽족 갱단을 응징해서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복수전을 어차피 죽게 될 자신의 마지막 전쟁, 트라우마를 떨쳐내고

죄를 씻는 기회로 삼는다면 그 얼마나 멋지겠는가?


월트는 계획을 아주 잘 짰다.

그는 타오를 끌어들이지 않고 혼자서, 총도 없이 복수할 계획을 짜고,

평소 그답지 않게 성모에게 기도하고 계획대로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이게 범죄라면 완전범죄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는 결국 죽었지만 겉으로는 완고하나 내면으로는 늘 불안한 과거의 모습으로 죽지 않았다.

그의 어깨에는 죄와 트라우마의 짐이 없다.

그의 희생으로 한 소년이, 한 남매가, 한 가족이 삶의 평안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평안의 주인공은 월트다. 저 세상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볍겠는가?

평생토록 그를 짓누르던 숙제를 해치웠다. 이 얼마나 멋지고 유쾌한 속죄의 죽음인가?


%EC%83%88%EB%A1%9C%EC%9A%B4%EC%8A%A4%ED%83%80%EC%9D%BC.JPG?type=w773 결행을 앞두고 이발하는 월트. 종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주문한다.


%EC%86%8C%EB%85%84%EB%B3%91%ED%95%AD%EB%B3%B5.JPG?type=w773 신부가 아닌 몽족 소년 타오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를 털어놓은 월트


%EC%9E%A5%EB%A0%AC%ED%95%9C%EC%B5%9C%ED%9B%84.JPG?type=w773 월트의 장렬한 최후. 그러나 그의 어깨에 죄와 트라우마는 없다.


<마지막 자존심 ‘그랜 토리노’>


영화는 월트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월트가 아내 도로시에게서 넘겨받아 마지막까지 돌보던 개 ‘데이지’는 그의 자식들이 아닌,

그가 끔찍하게 싫어했던 몽족 할머니에게 맡겨진다.

그리고 월트의 마지막 자존심, 그가 늘 닦고 조이고 기름치던 미제 자동차 ‘그랜 토리노’.

이 차는 단순한 기계장치가 아니다. 이 차는 미국의 융성기를 상징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디트로이트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공업 도시다.

‘그랜토리노’는 낡았지만 미국 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져 여전히 반짝이는,

그래서 당연히 지키고 계승되어야 할 미국의 소중한 유산이자 월트 자신의 분신이다.

월트의 입장에서는 미국적 가치의 정수이다.


%EB%8B%A6%EA%B3%A0%EC%A1%B0%EC%9D%B4%EA%B3%A0.JPG?type=w773 월트가 애지중지하는 미국제 명차 '그랜토리노', 그의 분신이다. 미국정신의 정수이다


그런데 이 월트의 자랑스러운 유산 ‘그랜토리노’는 백인도, 가족도 아닌 동양인 몽족 소년에게 상속된다.

인종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

한미한 야만족 출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소년에게 넘어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늘 멈춘 채로 있던 미국제 명차는 이제 몽족 소년의 손에 의해

비로소 도로를 힘껏 내달리고, 월트는 타오의 기억 속에서 영면한다.


%EC%9B%94%ED%8A%B8%EC%99%80%ED%83%80%EC%98%A4.JPG?type=w773 월트는 타오를 자식처럼 여기며 미래를 준비하도록 도와준다.



%EA%B7%B8%EB%9E%9C%ED%86%A0%EB%A6%AC%EB%85%B8.JPG?type=w773 타오가 운전하는 그랜토리노. 미국의 빛나는 유산은 백인이 아닌 몽족에게 전해졌다.


굳이 혈연이나 인종 따위에는 얽매이지 않겠다는 이와 같은 영화적 결말은

영화 초반부에 월트가 지향하는 가치와는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 정치적으로 가장 보수적이고 우파적 성향을 가졌다는 감독이

영화를 이렇게 만들다니... 미국의 우파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문법보다는 영화적 문법에 충실하자는 거장 감독의 새로운 도전,

가족의 신화를 지워내듯 이제는 인종적 신화와 편견을 걷어내자는

야심찬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EB%8D%B0%EC%9D%B4%EC%A7%80.JPG?type=w773 부인이 아꼈던 개 데이지를 몽족 할머니에게 맡기는 월트. 그는 인종적 편견에서 벗어났다.


<종교여, 얼치기 훈수는 이제 그만!>


영화 속에서 27살의 풋내기 신부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

신부는 월트에게 죽은 부인의 유언이라며 고해성사를 요구하지만 월트는 응하지 않는다.

신부의 종교적 언사는 월트에게 전혀 와 닿지 않는다.

월트는 복수전을 앞두고 사소한 내용으로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지만,

진짜 속내는 타오에게 털어놓는다. 삶과 죽음은 신학교의 교과서를 통해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적을 만나며, 고향에서 쫓겨나 머나먼 이방 땅의 감옥을 드나들며,

갱단에게 총칼질과 강간을 당하며 몸으로 배워내는 것이라고

월트는 신부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

결국 신부는 월트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종교적 언사가 얼마나 부질없고 공소한 것인가를 인정하고 만다.

이것 역시 보수적인 기독교의 본산인 미국에서 종교가

더 이상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음을 강조하려는 감독의 의도일까?(끝. 주2)


%EC%8B%A0%EB%B6%80%EC%82%B6%EA%B3%BC%EC%A3%BD%EC%9D%8C.JPG?type=w773 월트의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풋내기 신부. 그의 고백은 진솔하다.


(주2) 영화 <중앙역>도 종교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 영화 <중앙역>(Walter Salles,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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