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번 버스를 탔다. 빈자리가 있나 싶어 눈으로 쭉 스캔해 봤지만 자리가 없다. 이 버스는 예전 좌석버스 또는 관광버스처럼 생겨서 가운데 통로가 좁다. 양 옆 의자들 사이 좁고 긴 공간에 혼자 서 있어야할 때 굉장히 어색하고 민망하다. 앉아 있는 수십 개의 시선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갈 것만 같기 때문이다. 어정쩡하게 앞쪽에 서 있었는데 몇 정거장 더 가자 사람들이 우르르 타서 뒤쪽으로 밀려갔다.
그때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말았다. 젊은 외국인 커플이 나란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버스에서 온몸으로 낯선 시선을 받아내며 어색한 몸짓으로 서 있던 나는 어느새 흥미로운 관찰자로 변신했다. 내 입꼬리는 올라가고 눈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의자 바로 뒤에 서서 탐색을 시작했다. 창가에 앉은 남자는 그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지 책 페이지가 열 몇 장 정도 넘겨져 있었고, 옆 자리 여자는 이미 진도가 많이 나가 있어 책의 가운데쯤을 펼치고 있었다. 어떤 책을 읽고 있나 궁금해 남자의 책을 유심히 보니 영어로 쓰인 책은 아닌 듯 했다. 아는 단어 ‘ich’가 보인다. 여자의 책에서는 ‘danke’를 보았다. 이들은 독일어로 쓰인 책을 읽고 있었다. 영어 말고 그나마 제2외국어라고 일어밖에 모르지만, ‘이히리베디히’를 음악 시간에 불렀던 경험이 있었던터라 몇몇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남자의 외모는 전형적인 독일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갈색 머리에, 네모 안경을 썼고, 긴 얼굴에 각진 턱, 보수적인 얼굴이 독일 사람 같았다. 여자는 금발 머리를 정수리 근처에서 동그랗게 말아 올림머리를 했고 미인이었다. 여자가 읽고 있는 책은 소설 같았다. 따옴표가 눈에 들어왔다. 책은 누렇고 까슬거리며 가벼운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나라 책처럼 고급스럽게 예쁜 책은 아니었다.
나는 상상해 본다. 그들은 독일에서 혹은 독일어를 쓰는 어떤 나라에서 아시아, 그 가운데 반동강 난 남쪽 나라를 찾았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멋진 섬, 제주도로 날아왔다. 여행 전 짐을 쌀 때 책 한, 두 권은 챙길 정도로 평소에도 책 읽기를 즐긴다. 여행 도중 틈이 날 때면 책을 읽는다. 생경한 사람들과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잠시 자신의 언어로 된 책을 보며 마음에 평온을 가진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조차 흔들림없이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책이 주는 유익과 즐거움을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이 책 읽기는 이미 몸에 베어 있다. 둘은 습관도 관심사도 흥미도 닮아 있다. 버스에서 각자 책에 빠져 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곧 제주의 어떤 관광지에 내릴테고 그때는 손을 꼭 잡고 함께 즐길 것이다. 어쩌면 조금 전 읽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지도 모르겠다.
이 아름다운 커플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영어로 말해 볼까. 아니면 독일어 번역기를 돌려 볼까. 일단 ‘익스큐즈미’로 시작하면 되려나. 그때 예전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작년에 택시를 탔을 때 놀라운 장면을 보고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해 아쉬웠던 적이 있다. 내가 탄 택시가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을 때였다. 기사가 책을 꺼내더니 운전대를 책받침대 삼아 읽기 시작했다. 2,3분 짧은 시간 동안 조금 읽더니 신호가 바뀌자 책을 내리고 다시 운전을 한다. 그 모습에 감동 받아, 이 짧은 시간에 책을 다 읽느냐고 대단하다고 말했더니, “이래 아이먼 책 진짜 못 읽어얘. 요래 읽으마 한 달에 한 권은 읽어얘. 소설은 얘기가 이어지이까네 아예 못 읽지얘. 에세이나 자기계발서 위주로 읽어얘.” 한다. 대구말을 친근하게 쓰는 삼십 대 기사는 책 읽기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얼마나 책이 읽고 싶었으면 그 짧은 틈도 놓치지 않고 책을 펼까 싶었다. 택시 뒷자리에 앉은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담지 못해 후회가 되었다. 먼저 사진을 찍고 뒤에 양해를 구해도 됐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 커플들에게 말을 걸까 말까 하다가 그만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에 다다랐다. ‘즐거운 책 읽기, 멋진 여행 되세요.’ 속으로 인사를 남기고 버스에서 내렸다. 집까지 걸어가면서 생각해 본다. 왜 이 커플과 그 기사가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졌을까. 책 읽는 모습만 봐도 내 마음은 쿵쿵 요동하고 설레었다. 생각해 보니 그들과 나 사이에 느끼는 동질감과 어떤 유대가 있었다. 굳이 책이 주는 유익을 하나씩 꼽지 않더라도, 우리는 책 읽는 재미를 함께 알고 있는 듯 하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조차, 택시 운전을 하다 짧은 순간 속에서도 책을 펴서 그 재미를 맛보려 하니 말이다. 나도 가방 안에 늘 책 한 권은 넣어 다니는 걸 보면 책에서 얻는 즐거움을 누리려는 게 분명하다. 이런 동질감이 책을 매개로 그들과 나를 하나로 묶는 유대감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저 책이 좋아서 읽고 있으며 그래서 누리는 기쁨이 크다는 걸 아는 것 아닐는지. 그리고 우리의 책 읽는 모습은 감히 말하건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