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 전에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았고, 어제 <카모메 식당>과 같은 곳에서, 소설 <카모메 식당>을 읽었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누군가 사치에에게 말한다. “좋아 보여요. 하고 싶은 것 하며 사는 모습이.” “그냥 하기 싫은 걸 안 하는 것뿐이에요.” 사치에는 현명한 답을 내놓는다. 사치에는 옛날 식당처럼 이웃 사람들이 와서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음식은 소박하지만 맛있는 그런 식당이 좋았다. 하고 싶은 일이라 생각하며 낯선 땅 핀란드에서 식당을 열었지만 유럽 사람들이 일본의 주먹밥 오니기리를 좋아할 리 없다. 동양에서 온 어린이가 노동을 착취당하는 건 아닌지 의심도 받게 된다(서른여덟을 보고 어린이라니). 하고 싶었던 일이 마냥 하고 싶은 일로 남지는 않는다. 최소한 하기 싫은 일은 아니니 그래도 꾸준히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쭉 적어 본 적이 있다. 눈치 보는 것, 억지로 하는 것, 분주한 것,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특정 호칭으로 불리는 것, 속과 겉이 다르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 대구에서 사는 것 등이었다. 제주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이런 것들에서 많이 멀어졌다. 최소한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으며 사니 만족한다. 소설 <카모메 식당>에 나오는 세 여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일단 저지르고 본다는 점이다. 소박한 식당을 하고 싶은 차에 우연히 떠오른 나라 핀란드에서 식당을 연 사치에, 21년 한 직장에서 무료하게 살아오다 눈감고 지도에서 짚은 곳이 마침 핀란드라 짐싸들고 날아온 미도리, 부모의 병수발을 20년 째 해오다 혼자가 된 이후 텔레비전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핀란드 사람들을 보고 무작정 이 나라로 오게 된 마사코.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가는 대로 저질러 보면 잃는 것도 있지만 얻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지난 주에는 과학자 이정모 선생님의 <세상 물정의 과학>강연을 들었고, 도립미술관에서 마련한 <미술관 속 사진관>수업에 참가했다. 이정모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과학책보다 소설을 많이 읽히게 하라 하셨다. 인생에서 실패의 경험이 중요한데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다양한 경험을 해 보며 회복탄력성을 키워나가라는 것이다. 사진관 수업에서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에 대해 배웠다. 피사체를 잘 찍어보겠다는 마음만으로 찍은 사진은 작품이 되는 것 같았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 대상을 빛나게 해 주었다. 무엇을 위해 시간, 돈, 발품을 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번 저질러 보자는 마음만 있다면 못 할 것도 없고 반드시 얻는 것이 있다. 카페 <카모메 식당>과 같은 곳을 만났다. 제주 애월 동귀포구에 자리한 소박함과 아늑함을 품은 <하귀 1629>카페가 그런 곳이다. 열흘 전에 반만 읽고 남겨뒀던 <카모메 식당>을 마저 읽으려고 그곳을 찾았다. 트렁크를 끌고 여리여리한 여자 손님이 카페로 들어온다. 주인 언니는 시키지 않은 빵까지 곁들여 커피를 내준다. 주고받는 웃음과 따뜻한 대화에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손님이 나가면서 말한다. “요즘 애들이 자주 찾는 카페는 요란하기만 한데 여기는 아늑하고 좋아요. 주인 분이 꼭 이모처럼 따뜻해서 편히 쉴 수 있었어요.” 그녀는 서울서 무작정 제주로 왔다는데 다음에 다시 꼭 오겠다며 떠났다. <하귀 1629>에 가면 웃음이 맑은 주인 언니가 환대해 준다. 정성껏 차를 내려와 이야기를 나눈다. 벽을 둘러싸고 있는 책은 내가 읽었거나, 읽고 싶었던, 읽으면 좋을 책들이다. 조용히 앉아 책에 집중한다. 한 번씩 눈을 들어 포구에 들어서 있는 배를 보며 평온함을 느낀다. <카모메 식당> 사츠에가 꿈꾸고 그렸던 식당은 오니기리로 배를 채우고, 아늑함과 따뜻함으로 헛한 마음도 채울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나도 이곳에서 커피 한 잔 이상의 충만한 마음을 얻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