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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한날의꿈 May 27. 2019

축축한 날 받은 뽀송함

제주속 일상


밤새 비가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벚나무가 부러질 것만큼 흔들리고 비는 방향없이 흩뿌리고 있다. 오늘같은 날은 비 맞으며 어설프게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서 비를 바라보면 좋겠다. 밖은 축축하나 안은 뽀송뽀송하고, 밖은 위험하나 안은 안전하며, 밖은 요란하나 안은 아늑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비바람을 뚫고 아이와 학교까지 가야한다. 마음 단단히 먹고 튼튼한 장우산 하나씩 들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돌진한다. 우산이 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바람으로부터 우산을 지켜내야 할 만큼 비바람이 거세다. 우산이 뒤집힐 것 같아 꼭 붙들고 가지만 우산 살이 휘어지고 있다. 비는 얌전하게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아이는 “아, 아, 아...”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라서 소리만 내지르고 있다.
 
뒤에서 차가 와서 길 가장자리로 붙어가는데 차 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애월초등학교 가시죠? 태워드릴게요. 타세요.”
어떤 학부모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푸는 순간이었다.
“네, 감사해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차문을 열고 아이와 함께 올라탔다.
아빠가 운전하고 엄마가 그 옆 자리에, 얌전하게 생긴 여자 아이가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그 부모는 아이만 내리게 하곤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후, 내 아이와 그 아이를 현관까지 데려다주는 것은 내 몫이라 여기며 아이들을 이끌었다.
 
현관에 도착하자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들 우산을 접어주며
“어서 와. 많이 젖었지?”
하신다. 어릴 적에 학교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아무도 없으면 허전하고 힘이 빠졌다. 누구라도 잘 갔다 왔구나 반겨주면 학교서 힘들었던 게 다 사라져 버리곤 했다. 조그만 아이가 비바람을 뚫고 학교에 왔는데, 혼자 우산을 접고 교실로 들어가야 했다면 얼마나 쓸쓸했을까. 선생님이 환하게 웃어주며 맞이해주니 씩씩하게 교실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 같다.
 
아이랑 헤어지고 이제는 내 갈 길을 결정해야 할 시간이다. 이미 옷은 다 젖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런데 가방속에 챙겨온 패드와 키보드가 집에서는 제 구실을 못 할 게 뻔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오늘까지 쓰려고 마음 먹었던 글을 완성할 자신이 없었다. 일단 교문을 나섰는데 우리 집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내 앞에 선다. 그냥 타 버렸다.
두 정거장 뒤에 내려서 한담해변 카페로 왔다. 청바지가 다 젖어 티슈로 꾹꾹 눌러 물기를 닦고 있었다. 카페 직원이 커다란 부직포 타올을 건네며 닦으라고 한다. 티슈보다 물기를 잘 빨아들였다. 잘 썼다며 돌려주자 한 장을 더 주며
“많이 젖으신 것 같은데 쓰시고 천천히 주세요.” 한다.
다리에 척척 감기는 젖은 청바지 따위는 직원의 친절로 금세 말라버릴 것 같았다.    
 
카페 창문을 타고 내리는 빗줄기 너머로 비양도가 희미하게 보이고 파도는 거칠게 몰려 온다. 시간이 지나자 바지와 신이 말라 내가 있는 이곳이 아늑하고 안전한 곳이 되었다. 아침부터 비와 함께 나를 찾아온 친절을 생각한다. 빗속에서 헤매던 모녀를 방주에 태워준 고마움이 있었다. 학교 현관에서 우산을 접어주며 맞이하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흠뻑 젖은 옷을 보고 뽀송함을 주고 싶었던 건넴이 있었다. 이들 때문에 비 오는 날이 마냥 축축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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