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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과 장유진

by 이경


극장에서 영화 [1987]을 봤다.


와이프와 언제 마지막으로 극장에 갔는지 생각해보니 [곡성] 보고 처음 갔다. 곡성이 2016년 여름에 개봉했으니 일 년이 넘어갔나 보다. 아들 원, 투 키우다 보니 연애시절 흔히 보던 영화도 연중행사가 됐다. 뭣이 중헌디.


[1987] 영화에서는 마이마이 워크맨을 비롯해서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드는 많은 장치가 있었다. 감독과 소품 팀에서 시대 고증에 철저하게 힘쓴 흔적이 보였다.

사실 1987년도를 떠올릴만한 것이 나왔다 하더라도 내가 그 시절을 세세히 기억하긴 어렵다. 1987년이면 내 나이 7살 때다. 국내 정치 상황보다는 구슬치기에 몰두하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좋았던 하나를 꼽으라면 극 중 연희(김태리)가 라디오를 들을 때다. DJ가 유재하의 음악을 소개했다.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얼핏 듣고는 성우 장유진 씨일 거라 생각했다. 내 귀가 의심스러워 나중에 영화 엔딩 크레딧을 확인해보니 [1987]의 라디오 DJ는 장유진 씨가 아닌 성우 강희선 씨였다.


장유진 씨는 '감기 조심하세요'를 비롯해서 토요명화 등에서 오드리 햅번, 메릴 스트립 등을 주로 연기했다. 강희선 씨는 지하철 1,2,3,4 호선 안내방송 및 더빙 영화에서 샤론 스톤, 미셸 파이퍼, 짱구 엄마 등을 연기했다. 두 분 모두 일상생활에서 계속 들어왔던 익숙한 목소리다. 누구라도 목소리를 듣는다면 "아! 이 목소리!" 할 만큼 친숙한 목소리를 지녔다. 비록 나는 두 분 목소리를 착각하긴 했지만.


두 분의 목소리를 헷갈린 내 귀를 스스로 변명해보자면 장유진 씨가 영화에서 DJ 역할을 했다면 더 그럴싸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 1987년도에 장유진 성우는 [가요산책]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 시절 강희선 씨도 라디오를 진행했는지는 모르겠다.


KBS 라디오 DJ, 성우들이 [우리 노래 어때요]라는 앨범을 낸 적이 있는데 이 앨범이 바로 1987년에 나왔다. 장유진 씨를 비롯해서 황인용, 오미희, 최화정, 송해 등이 참여한 앨범이다.

(앨범에는 그 유명한 김희애의 <나를 잊지 말아요>가 수록됐다.)

장유진 씨는 앨범에서 <풀꽃 연가>라는 곡을 불렀다. 어릴 때 이 앨범을 구하지 못해서 음원을 찾아 듣던 곡이다.

어때요.jpg [우리 노래 어때요] 앨범


국내에서 가수, 성우 다 합쳐서 가장 푸근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가 성우 장유진 씨다. 이유는 딱히 꼽기 어렵다. 워낙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목소리라서 그런 걸까. 사람은 가끔 스스로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더니 나는 강희선 씨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장유진 씨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나 보다.


장유진 씨의 목소리가 유난히 좋은 순간이 있다. 택시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다. 어릴 적 새벽택시에 그녀의 음성이 흘러나오면 그게 그렇게 좋았다. 심신이 지쳤을 그때 그 시절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나이 먹고는 그녀의 시낭송 앨범을 사서 듣기도 한다.


영화 [1987]의 내용과 시대상은 분명 서글픔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강희선 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그리고 장유진 씨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었던 점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장유진 시낭송 앨범



장유진 <풀꽃 연가>


그리움에 밤마다 두 손 모으던 내 어느 기도가

하늘에 닿아 그대 내 앞에 오셨나요
달이 뜨면 달 속에 비가 오면 빗속에 서있는 당신
나는 겨울나무처럼 추운 거리에 서 있어도
그대 이름 부르면 슬픔도 달콤해요
비 오는 소리도 따스해요
아무 말도 말고 언제나 거기 계세요
아! 작은 햇살에도 얼굴 부끄러운
풀꽃 같은 풀꽃 같은 내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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