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청탁을 받고서...

by 이경
너실격.jpg 짤은 아무 의미 없다.



무슨무슨 매거진에서 a4 두어 장 분량의 에세이 한 꼭지를 요청한바, 마감을 2주나 남겨두고 원고를 보내었으나, 48시간이 흘러도 가타부타 이렇다 할 피드백이 없어서, 아아, 이거 참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아니했나 보구나, 이렇다면 나에게 원고를 청탁한 젊은 기획자도, 또 나도 서로 간의 입장이 난처하고 곤란해지겠구나, 싶은 마음에, 선생님, 피드백이 없으셔서 이렇게 확인차 메일을 드려요, 혹시 생각하셨던 원고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괜찮으니 부담 갖지 마시고 연락을 주셔요, 제가 2주나 앞서 원고를 보낸 것은 제 원고가 꽝일 것을 심히 우려하여, 재작성을 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함이니, 제 걱정일랑 하지 마시고, 연락을 주시어요, 하였으나 이 젊은 기획자의 답변인즉슨, 아이고, 작가님, 원고를 이렇게 빨리 보내주실 줄은 몰랐어요, 사실은 제가 원고를 아직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였다는, 내용이었으니 그제서야, 아아 내 원고가 그렇담 아직 꽝인 것은 아니구나 싶어서 48시간 동안 긴장과 걱정을 하며 쪼그라들었던 부랄이 조금은 풀린 것이다. 후우.


보통의, 정상적인, 자기 글에 자신이 있는, 제대로 된 작가라면 마감의 마감 직전까지 원고를 다듬고 매만지고 고치고 고쳐서 담당자에게 보낼 텐데, 나는 어찌 된 모양인지, 내 글에 자신이 영 없달까, 작가로서의 프라이드 뭐 그런 게 당최 없어서, 담당자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어찌하나 하는 마음에, 초안을 휘갈겨놓고서는, 대충 맞춤법이나 한 번 확인하고서는, 원고를 툭 보내 놓고서는, 제가 이렇다 할 문체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다만 머리에 든 것이 많이 없어서, 텅 빈 도화지 같다고나 할까, 그 덕에 다른 사람의 문체를 곧잘 흉내 내니, 행여나 원고가 맘에 들지 아니한다면 그때는 또 조금 다른 스타일로 써봐 드릴 터이니, 하는 저자세의 모습을 보인달까, 그러니 이거이거 누가 나 같은 사람을 작가라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역시 보통의 정상적인 마감 직전에 원고를 보내는 여느 작가님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닌가, 싶어 오늘도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도 나 같은 미천한 글쟁이를 찾아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모른다. 다른 후리랜서 작가들 원고 청탁받으면 청탁자가 일절 원고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 곤란한 경우도 많다 들었는데, 나에게 원고 청탁을 한 기획자는 첫 메일에 원고료를 언급, 아니, 조각 글 하나에 이 정도 원고료라면, 글 다섯 편만 써도 책 한 권 계약했을 때의 선인세와 진배없는 것 아닌가 싶어서, 아이고 굽신굽신, 미천한 제 글 쪼가리에 이렇게 큰돈을 주신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며,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면 그건 또 너무 아마추어 같아 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 나도 원고료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은 채 그저 원고에 대한 퀄리티만 논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쓰는 글이 채택이 된다면 이게 어디어디 무슨무슨 백화점 문화센터 매거진에 실린다는데, 아아, 그동안 저렴한 아울렛이나 주야장천 다니던 나와는 달리 내 글은 으리으리한 백화점에 등장할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니, 아아 역시 여러모로 글은 글쓴이보다 나은 법이다, 내가 백화점에서 윈도우 쇼핑 할 때 내 글은 백화점 구석구석에 놓일 수도 있겠구나, 아아 이경의 출세는 멀었으나 이경이 쓰는 글은 많이 발전했다, 출세길에 오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만 감격의 눈물이 솟구칠 지경이다.


조각 글 하나에 원고료가 이 정도라면 여기저기에 기고하고서 원고료 헌터가 되어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지만서도, 역시나 나는 단행본을 목표로 하는 글쓰기가 가장 재밌다. 조각 글과 달리 하나의 책은 뭔가 정리가 되고 큰 덩어리 하나를 마감 짓는 기분이라, 내게 조각 글은 큰 의미는 없고, 역시 책, 단행본을 목표로 글을 써보아야겠다, 생각하지만, 다른 작가 선생님들과 달리 2주나 앞서 마감을 쳐버리는, 도화지 같은 글쟁이의 미천한 원고라도 필요한 출판사 잡지사 기획사 등등이 계시다면 그때는 저를 불러달라는, 뭐 그렇고 그런, 자기 PR의 막돼먹은 글이랄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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