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갈 준비

by 이경



기형도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의 자서, '시작 메모'를 좋아한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하는 부분을 좋아하는데, 이 문장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문장의 화자가 능동인인지, 수동인인지 헷갈린다.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것은 언제든 바로, 적극적으로, 실행할 마음 가짐이 있다는 얘기인데, 또 '따라가다'하는 동사를 생각하면 이것 만큼 수동적인 게 있을까, 싶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란, 단어의 조합에서 오는 생경함이 재미난 작품인데, 기형도는 그 시작 메모부터가 이런 생경한, 능동적인지 수동적인지 모를 느낌을 주어서 좋아한다.



나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게 몇 있다.


누군가 제육덮밥을 사준다고 하면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누군가 제육쌈밥을 사준다고 하면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누군가 제육볶음을 사준다고 하면, 그러니까 대충 제육 짱이라는 얘기.


그 외엔,

누가 인기 작가를 시켜준다고 하면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근데 인기작이 없네...

누가 대작가를 시켜준다고 하면 그때도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근데 대작도 없네...

그럼에도 출판사가 따라오라고 하면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아, 출판사 한 곳에서 '나를 따르라' 해서, 쫄래쫄래 따라가는 중입니다. 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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