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하는 문장은 만화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의 초반부에 인용된 것으로 처음 접했다. 언젠가 인용문으로 쓰인 책을 꼭 읽어야지, 읽어봐야지 하다가 최근에서야 책을 구해 조금씩 읽고 있다.
그 책은 바로 100페이지가 안 되는 강유원의 <책과 세계>.
살림출판사의 '살림지식총서 85호' 책이다. 2004년에 나온 책은 20쇄를 넘어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 나처럼 어디에선가 인용된 문장을 찾아 읽어보는 독자도 있는 거겠지. 책이란 원래 새로운 책을 낳는 법이니까. 100페이지가 안된다고 해서 며칠 내에 볼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다. 인용문으로 쓰인 그 꼭지 하나 읽고서는 진행이 지지부진이다. 완독이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중략)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 강유원 <책과 세계> 中
그러게. 책 따위 읽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에 별 문제없을 것 같은데. 머리 아프게 굳이 책 그걸 읽으려고 그러는가 싶다. 나도 몸 건강하고 팔팔하던 이십 대에는 책을 멀리하고 살았다. 나이 들고 병들고 의기소침해지면서 책을 좀 읽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건강하게 살았더라면 책 따위와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책 따위. 그래, 책 따위.
책을 좀 읽다 보니까, 이쪽 세계의 사람들, 그러니까 책을 좀 읽는다 싶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현실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다. 몽상가들. 세상은 마치 비독서가와 독서가로 구분할 수 있을 듯 책이란 아예 무시되거나 푸욱 빠지거나 하는 극과 극의 물건처럼 느껴지고, 책은 그런 몽상가들의 애장품으로 보이는 것이다.
여하튼 병든 인간이라 책을 읽는 것인지, 책을 읽게 되어 병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책과 병은 뗄 수 없는 사이로 보인다. 그렇다면 읽는 사람, 즉 독자만이 병든 인간인 걸까. 쓰는 사람은 어떠할까.
'내가 해봐서 아는데' 같은 이야기는 너무 꼰대스러워서 좀 별로이긴 한데, 어디 가서 아는 척 잘난 척 하기에 이 멘트만큼 좋은 게 또 없다. 책을 읽는 데에 그치지 않고 쓰는 사람이 되어보니, 오로지 읽는 자만이 병드는 것은 아닌듯하다.
내가 책을 써봐서 아는데, 내가 책을 내봐서 아는데, 책을 쓰는 이 역시 병들기 쉽다. 최근 페이스북 등에서 몇몇 분들과 친구를 맺었는데, 끼리끼리 모인다고 어째 하나같이 다들 책을 좋아하고 심지어 작가를 지망하는 분들도 적잖이 계신 듯하다.
작가 지망생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책 <작가의 목소리>를 쓴 까닭으로, 일단 책은 팔아먹어야 하니까, 아, 작가 지망생이십니까? 그렇다면 일단 제 책을 한 번 읽어봐 주십시오, 하며 악마의 미소를 흘리지만, 내가 해봐서 아는데, 책을 내봐서 아는데, 본심 그대로를 드러내자면 작가 따위 애진작에 때려치우시라고 강권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진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책팔이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죄를 짓는 기분이다. 나는 책을 팔아먹기 위해 지옥행 특급열차의 특등석 티켓을 끊은 것일지도...
그렇다면 어째서 책을 쓰는 일은 병이 드는 일인가. 일단 장시간 모니터를 째려봐야 하니까 눈이 뻑뻑해져 안구가 건조해지고 시력 저하 및 이른 노안이 생길 우려가 있다. 봄철이라 그런지 지난주에는 유난히 빡빡해진 눈알들이 시위를 하는 탓에 약국에서 인공눈물을 사서 넣어주었다.
어느 날인가부터는 손목을 돌리면 탁탁하고 무엇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는데 의사가 아니라서 소리의 원인 따윈 알 수가 없다. 다소간의 불편함은 있지만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라서 병원도 찾질 않는다. 골프채를 휘두르며 여가를 즐기는 데에 쓰여야 할 손목이 고작 글 따위나 쓰면서 망가지고 있으니 속이 아니 상할 수 없다.
보통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는 이걸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글을 써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글은 엉덩이로 쓴다의 본뜻은 글을 쓰다 보면 치질이 됐든 변비가 됐든 항문 질환을 겪을 우려가 있으며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한 유명 작가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전하는 글쓰기 조언으로 '치질에 걸리지 말 것'을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마감이 있는 글쓰기를 하게 된다면, 실제 항문 질환이 없더라도 정신적 피똥을 싸는 경험을 하게 된다. 글을 쓰면서 육체적 고통을 넘어 정신적 고통으로까지 병이 번지게 되면 이제는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내 글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다, 하는 인정 욕구가 폭발하여 책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하루하루가 고통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책은 끝없는 욕심을 불러온다. 책 하나 분량의 원고만 쓸 수 있다면, 하던 목표를 이루게 되면 드디어 출판사의 문을 두드린다. 단 한 사람의 편집자만 설득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내 이름이 박힌 책 하나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왕이면 괜찮은 출판사에서 괜찮은 마케팅으로 책을 알릴 수 있으면 좋겠지. 이왕에 책이 나온다면 좀 잘 팔린다면 좋겠지. 시중의 책 대부분이 초판을 다 못 팔아먹는다고 하지만, 이왕이면 중쇄를 찍을 수 있으면 좋겠지, 중쇄를 찍게 된다면 3쇄 4쇄 5쇄 10쇄 찍으면 더 좋겠지. 문체부나 군부대에서 추천도서로 오르면 나라에서 수백만 원어치 책을 사준다던데 그런 것도 걸리면 좋겠지. 예스24든 알라딘이든 교보문고든 영풍문고든 서점 md들이 눈여겨봐주면 좋겠지. 그렇게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강연자가 되고 인플루언서가 되고 슈퍼스타가 되고 경제적 자유를 얻고 퍼스널브랜딩을 이루고 세바시에 나가서, 아 글이라는 것은 말이지요, 저처럼 써야 하는 겁니다, 엣헴 하고서 잘난 척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 이왕이면. 이왕이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출간은커녕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다 못쓸 확률이 높으며, 책 하나 분량의 글을 써낸다고 해도 괜찮은 출판사, 괜찮은 편집자를 만나는 일이 일어나리란 보장도 없다. 뭐 여차저차 어찌하다 책을 내게 되었다고 치자. 호기롭게 서점에 초도 배본된 책은 겨우 일주일 정도 신간 매대에 머무를 뿐, 곧장 서가에 한 부만을 남겨놓고는 모조리 반품이 되어버린다. 초판 1쇄로 인쇄한 책 일천 부중 기실 50 여부 만이 이런저런 서점의 서가에 자리를 잡고 있을 뿐 나머지 책들은 창고에 쌓여 먼지를 먹어가며 썩어가는 것이다. 책을 팔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책이 망했다는 좌절감과 "서점에 갔더니 네 책 안보이더라." 하는 눈치 없는 지인의 멘트에 울화통이 터짐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책을 낸 이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으며 질투심과 열등감이 터진다.
입은 쓰고 당장 나를 몰라봐주는 세상을 향해 욕이 나올 것 같지만 주변에서 '작가'라고 불러주는 극 소수의, 대략 한 서너 명의 사람들을 생각하니 어쩐지 품위를 지켜야 할 것만 같아서 욕도 쉽지 않다. 그 후에도 책은 시시각각으로 글쓴이의 목을 조여 온다. 출판사와 작가의 저작물의 계약기간은 보통 3~5년. 어지간히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면 책의 생명력은 여기까지다. 책은 절판이 되고 파쇄가 되어 세상에서 사라진다.
민폐를 끼쳤구나. 출판사에도, 자연에도. 수많은 나무들이 나의 글로 인해 사라졌다는 생각에 후손들을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이처럼 내 이름으로 된 책 하나만 낼 수 있다면, 하고서 순수한 마음으로 글을 쓰던 이는 어느새 책으로 인하여 하루하루 새로운 욕심과 그때마다 좌절을 겪으며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게 되는 것이다.
병든 사람만이 책을 읽는 것처럼, 책은 이렇게 글을 쓰는 이 역시 병들게 만든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아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 작가가 되어서 책을 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몸과 정신을 생각해서 때려치우시길 바란다. 글을 쓸 시간에 책을 읽을 시간에 요가나 필라테스, 등산이나 조기축구회에 가입하는 것이 훨씬 삶을 이롭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수많은 좌절의 길을 나서보겠다, 글을 써보이겠다, 책을 내보이겠다, 그리하여 꼭 잘난 척을 하고 싶다 하는 분들은 여기 무명의 글쟁이 이경이 쓴 <작가의 목소리>를 읽어달라 이겁니다.
지난주 인공눈물을 사는데 14,000원이 들었습니다. <작가의 목소리> 10권을 팔아도 저에게 들어오는 인세는 13,500원... 인공눈물을 사는 데에 오백 원이 모자라다, 이 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