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울
글 쓰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감정기복이 심한 편이다. <작가의 목소리>에 농담처럼 썼지만 책을 내면서 가장 좋은 점은, 책을 냄으로써 정말 글 쓰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느낌이 들고, 평소 감정기복이 심하다는 자책감에 어느 정도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아,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조금 예민하게 굴어도,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푸욱 가라앉는 기분이 들어도, 누군가는 이해해주지 않을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우울은 워낙 다양한 지점에서 다가오기 때문에 원인 하나를 특정 지을 수는 없지만, 가끔 이런 기운들을 SNS에 툭툭 올리곤 한다. 온라인 세계란 것이 으레 그러하듯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누군가는 공감을 표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가끔 이렇게 우울한 기운을 풀풀 풍기고 다닐 때에 누군가 나의 감정 상태를 살피고 있구나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영락없이, 아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인데, 내가 지금 민폐를 끼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2. 우울과 당근
나의 심리상태를 면밀히 봐주는 듯하는 사람은 출판사 편집자다. 그런 점에서 출판 편집자들은 심리학자와 하는 일이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모든 편집자가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떠한 편집자들은 때로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역할까지 한다고 믿고 있다.
최근 SNS에서 조금이라도 우울한 기운을 풍길 때에 <작가의 목소리>를 작업했던 편집자는 너의 우울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당근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하나둘 던져준다. 이분이 지금 나를 위해 되게 애를 쓰고 계시는구나, 싶어져서 고맙고도 미안하다.
3. 당근과 밀리의서재
어제오늘 편집자는 당근이 될 만한 것으로 밀리의서재 속 <작가의 목소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밀리의서재는 회원가입을 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장막을 쳐놓은 듯 그 안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 알 수 없다.
첫 한 달은 무료라는 것을 알면서도 밀리의서재 회원 가입은 하질 않고 있다. 그런 나를 위해 편집자가 밀리의서재 속 <작가의 목소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어제 밀리의서재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인기 에세이 10위였다고 했다. 오늘 밀리의서재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인기 에세이 9위였다고 했다.
4. 밀리의서재와 김영하
나는 기업이 어떤 식으로 돈을 버는지 그 구조와 돈의 흐름에 대해 취약한 편이다. 평생 부자가 되기는 글러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밀리의서재는 어떤 식으로 돈을 버는 걸까. 어떻게 돈을 벌어서 출판사와 작가에게는 어떤 식으로 수익을 안겨주는 걸까.
여전히 잘 모른다. 여기저기서 들은 얘기로는 하나의 책에 스물다섯 정도의 구독자가 모이면, 책 하나 팔린 것으로 간주한다던가. 역시나 책을 써서 돈을 벌 생각을 하느니 금속탐지기를 사서 놀이터를 한 바퀴 도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처음 밀리의서재가 생기고, "요즘도 책 사러 서점 가요?"라는 문구로 광고를 한 탓에 김영하가 욕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시대는 급변하고 이제는 밀리의서재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려는 출판사와 작가들도 보이는 것 같다.
처음 mp3가 세상에 나왔을 때, CD를 사서 음악을 들으라며, mp3를 욕하던 뮤지션들이 이제는 사라진 것처럼, 밀리의서재를 비판하던 이들도 이제는 거의 사라진 것 같다. 여전히 회원가입을 하지 않아서 그 안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5. 김영하와 찌질
요즘 어떤 서점에 가면 김영하가 추천한 책으로만 큐레이션 해놓은 매대가 있을 정도다.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이란 대단한 것이로구나, 싶다. 김영하가 추천한 책들은 현대작품이든 고전이든 장르를 막론하고 모두 베스트셀러 차트에 오르니 이 정도면 출판사에서는 김영하에게 광고비를 주고서라도 자신들의 책을 추천해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가끔 김영하가 내가 쓴 책, 가령 <난생처음 내 책>이나 <작가의 목소리>를 추천하는 상상을 하다가도, 아, 이거 진짜 찌질해서 못살겠네 싶어 진다. 그래 뭐 나는 좀 찌질해야 제맛이지 싶어지기도 하고.
6. 찌질과 샘/쌤
찌질의 표준어는 '지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찌질'이라고 쓴다. '바라'를 '바래'로 쓰는 것처럼. 알면서 쓰는 것과 모르면서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니.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 요즘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쌤'이라는 부른다. 이 '쌤'이라는 것도 결국 '선생님'을 줄여 표기하는 것일 텐데, 누군가는 '샘'이라고 쓰기도 하고, 누군가는 '쌤'이라고 쓰기도 한다. 아무래도 나는 후자다. '샘'이라고 하면 선생님이 아닌, 땅에서 솟는 물이 떠오른다.
7. 쌤과 작가
내가 하는 고민과 마찬가지로 나를 알게 된 누군가는 나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고민을 하기도 하겠지. 이 생끼는 뭐하는 생끼인가 싶다가도, 프로필에 이런저런 책 제목들을 늘어놓았으니, 아 이생끼는 글을 쓰는 생끼로구나, 그렇다면 작가라고 불러주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작가'라고 불러주는 사람들도 분명 계신 거겠지.
온라인으로 알게 된 누군가가 나를 놈팽이가 아닌 '작가님'하고 불러주면 나는 그만......
그러니까 나의 열등감이란 이런 데에서 발현을 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던 누군가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면, 저를 아세요? 제 글을 읽어보셨어요? 정말 저를 작가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하고서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 진다. 심술이라는 걸 아니까, 실제로 이렇게 묻지는 않는다. 역시 나는 좀 찌질해야 제 맛이지 싶으면서...
8. 작가와 이외수
어제 간밤에 들려온 이외수의 별세 소식에 잠시 마음이 저릿했다. 연애시절 지금의 와이프에게 선물했던 책은 다름 아닌 이외수의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작가의 목소리>에는 글쓰기와 관련된 이런저런 책들을 추천해놓았는데 그 처음이 역시 이외수의 책이었다. 그의 정치적 성향, 사생활 논란 등을 차치하고 나는 그의 글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9. 이외수와 소통
정말 좋아하는 단어도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시간이 흐르면서 끔찍해질 때가 있다. 내겐 '소통' 같은 단어가 그랬다. 어릴 때는 '소통'이란 단어가 참 아름답다고 여겼는데.
여기저기에서 소통이니 어쩌니 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불통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사는 느낌이다. '소통'이라는 단어마저도 그 의미가 퇴색되어버린 느낌이랄까.
이외수는 정말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그 매개가 트위터였다는 게 결과적으로 조금 아쉽지만.
10. 소통과 감정
한 15년 전쯤엔 나도 이외수 선생과 소통할 방법을 찾곤 했다. 디시인사이드 이외수 갤러리에서 잠시 활동을 했던 것이다. 글쓰기 따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누군가의 문하생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이외수를 싸부님으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디시인사이드 이외수 갤러리에서 몇몇 장난꾸러기들은 개똥망 같은 글을 올리고선 이외수에게 '제 글 평가해주세요'하는 글을 남기곤 했다.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하는 이외수 특유의 멘트를 그때 많이 보았다.
머저리 같던 글과 그런 머저리 같던 글에도 상대를 해주던 이외수 선생이었다. 머저리 같던 광경에도 그때는 그게 참 재밌었다. 그때의 그 감정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11. 감정과 히치콕
그러게 그 감정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이런 생각 탓인지 어제는 러셀 히치콕(Russell Hitchcock)의 <Where Did The Feeling Go?>를 들었다.
그때 우리들의 감정들은, 우리가 함께 듣던 음악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러셀 히치콕은 '에어 서플라이'의 보컬인데 어릴 때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고음을 너무나 쉽고도 깔끔하게 올려버리니까능, 보컬에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잖아. 뭔가 내가 듣고 좋아하기엔 구닥다리의 느낌도 들었고. 그랬는데 나이가 차면서 즐겨 듣지 않던 히치콕의 보컬도 찾아 듣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많은 고전 클래식 음반들을 찾아 듣게 되겠지.
12. 히치콕과 여기까지
중얼중얼 길게도 쓴다. 여기까지 읽어주는 이가 있을까. 있나요? 있어요? 완독 되지 않는 글이란, 완독 되지 않는 책이란 얼마나 서글픈 것인지.
13. 완독이란 무엇인가
다시 처음으로, 밀리의서재에서는 책의 완독률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어제 출판사 편집자님이 알려준 <작가의 목소리>는 인기 에세이 10위에서 완독률 72%를 보였다. 편집자님 말로는 눈에 보이는 인기 에세이 30종 중에 <작가의 목소리> 완독률이 가장 높다고.
그러게. 왜 높지. 왜 높을까. 나는 사는 책의 10%도 완독을 못하는 거 같은데. 72% 완독률이면 대단하잖아.
<작가의 목소리>를 완독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걸까. 이 인간이 무슨 헛소리를 해대는 걸까, 씩씩 거리면서 읽어나가는 걸까. 아니면 읽는 맛이 좋아서 계속 읽어주는 걸까.
14. 문체와 하루키
<작가의 목소리>를 완독 해주시는 데에는 문체의 영향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최근 <작가의 목소리>를 읽어주신 분들에게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딱히 하루키의 문체를 흉내 내려했던 것은 아니고, 고백하자면 다자이 오사무의 요설체를 흉내 내긴 했다.
책에 쓰인 그 수많은 쉼표들, 모두 다자이의 영향입니다.
하루키처럼 읽혔다는 것은 결국 번역투의 문체라는 게 아닐까 싶다.
15. 번역투란 무엇인가.
가끔 글쓰기 책을 보면 번역체는 나쁘다, 번역투는 나쁘다 하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에게서 "그게 왜 나쁜데요?" 물으면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이는 많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루키가 요즘에도 그렇게 글을 쓰는지 모르지만, 초기에는 일본어로 쭈욱 썼다가, 그걸 영어로 번역했다가, 그 번역문을 보고 다시 일본어로 썼다지. 그러니까 하루키는 자신의 글을 일부러 생경한 느낌이 들도록 번역체로 썼던 것이다.
국문학 못지않게 일문학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일문학을 읽을 때의 그 생경한 느낌의 문장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런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절대적 진리인양 번역체는 나쁘다고 주장하는 글쓰기 선생님들 다 바보.
물론 나는 국어 말고는 다른 언어로의 번역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루키처럼 내가 쓴 글을 다른 언어로 바꾸고 다시 모국어로 쓰는 일을 하진 못하고, 그저 지금까지 읽었던 일문학의 몇몇 문체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16.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지질/찌질, 바라/바래처럼 알고서 쓰는 것인지, 모르고서 쓰는 것인지의 차이이기도 한데. 누군가 <작가의 목소리>를 읽고서, 아 이런 말 하면 작가님이 좋아하실지 어떠실지 모르겠어요, 저는 읽으면서 하루키의 글을 읽는 것 같았어요, 라며 그 마음을 드러낼까 말까 고민하는 분들이 계신데, 저는 좋아합니다.
그러니 많이 이야기해주세요. 의도하고서 쓴 글입니다. 번역체로 읽으셨다면, 하루키 문체처럼 읽으셨다면 제 의도대로 읽어주신 겁니다, 하고서 우울한 마음을 벗고서 잘난 척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17. 서점 이야기
어제는 노원에 일이 있어 갔다가 노원문고에 들렀다. 책의 날이라고 책과 서점과 관련된 책들이 큐레이션 되어 있었다. 배지영 작가님의 <환상의 동네서점>이 진열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노원문고에서는 <여학교의 별> 2권을 사서 왔다. 이 책의 제목을 읽을 때 비오 <카운팅 스타>의 '밤하늘의 퍼얼~' 멜로디로 읽곤 하는데, 이거 나만 그런 건가요.
와야마 야마의 만화에서도 생경한 번역체가 잘 느껴진다. 뭔가 일문학을 접했을 때의 그 묘한 느낌들.
와야마 야마는 보물과도 같은 만화가가 아닌가 싶어지기도 하고.
18. 서점 이야기. 2
와타야 리사의 신작 장편 소설도 나왔던데, 얼핏 듣기로 퀴어 소설이라고 해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젊은 날의 와타야 리사 얼굴을 참 좋아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좋아했냐면, 싸이월드 사진첩에 와타야 리사의 얼굴 사진을 올려놓았을 정도로?
19. 싸이월드
싸이월드 부활 이후로 어제 처음 로그인을 해봤다. 뭐 아무것도 뜨질 않아서,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20. 서점 이야기. 3
요즘 서점에 가면 포켓몬 게임기 설치해놓은 곳이 좀 있는데, 주말이면 부모와 아이가 그 기계 앞에서 여럿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손으로 버튼 와다다다다다다 누르는 게임인데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뭔가 조용한 서점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계가 아닌가 싶으면서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뭐 저런 게임기가 서점에 있어도 나쁠 건 없겠지 싶기도 하다.
어떨 때는 책을 보는 사람보다 포켓몬 게임기 앞에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아, 이제 그만 써야지. 웅얼웅얼 중얼중얼이 몹시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