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으면 선명해지는

by 이경



몇 년 전, 고종석 선생님이 쓰신 <고종석의 문장>을 읽었다. 책에는 우리말로 된 좋아하는 단어 열 개쯤을 적어보라는 글이 있었는데, '그저', '설레임', '그리움', '아련함', '애틋함' 뭐 그런 단어들을 떠올렸던 거 같다. 그리고서 떠올린 단어 하나가 바로 '선명'이었다. 비록 우리말로 된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단어다.


선명(鮮明) - 산뜻하고 뚜렷하여 다른 것과 혼동되지 않음 (네이버 국어사전)


선명이라는 단어는 생긴 것도 그렇고 똑 떨어지는 발음도 그렇고 어쩜 단어의 뜻과 그리 잘 어울릴까 싶어서 좋아한다. 입으로 뱉거나 듣기만 해도, 혹은 쓰여진 단어를 보고 있기만 해도 눈이 밝아지는 기분이 든다.


선명. 선명. 선명.


때로 어떠한 상황이나, 기억, 또 풍경과 사람 등은 눈을 감았을 때야 비로소 선명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분명 명확함을 뜻하는 단어임에도 감성적이고 따뜻한 느낌까지 아우르는 것 같아서 재밌기도 하다.


물론 좋아하는 단어라고 해도 선명하게 다가오는 모든 것이 아름답지는 않다. 대출이자 납기일이나 카드 지출일의 선명함이 그러하고, 고통이나 아픔 따위가 선명하게 느껴진다면 어떻게 해서든 다시 희미하게 만들고 싶다. 결국 무엇이 선명해지느냐에 따라 어떠한 선명함은 아름답고, 어떠한 선명함은 서글프다.


성격 탓인지 오랜 세월 눈을 감았을 때 떠오르는 것도 아름다움보다는 대개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이었다.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는 자려고 눈을 감고 있으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상상되어 두려움에 떨곤 했다. 요즘 세상과 달리 인신매매나 유괴 사건이 빈번하던 시절이었고, 나는 쫄보였다.


쫄보가 커봐야 덩치 큰 쫄보밖에 더 될까. 나는 겁이 많은 성인이 되었고, 회사를 다니고 책임이 따르는 일을 맡으면서부터는, 눈을 감을 때마다 자책하기에 좋은 실수 등이 반복되어 떠올라 괴로웠다.


그렇다고 눈을 감을 때마다 늘 우울한 일이나 상상만 선명하게 떠오른다면 삶은 너무나 피폐해지겠지. 처음 당구를 배우기 시작한 이들의 감은 눈 위로 당구공의 길이 보이고, 주식 세계에 빠진 이들의 감은 눈 위로 차트가 보인다고 하듯이, 나 또한 푹 빠져 지내는 게 생기면 절로 그것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다행히도 그것들은 꽤나 아름다운 편에 속한다.


특히 살아가면서 특정한 누군가는 눈을 감을수록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처음에는 분명 가벼운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었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고야 마는 그를 가리켜 나는 늘 '사랑'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정지찬과 박원으로 이루어진 듀오 '원 모어 찬스(One More Chance)'도 <눈을 감으면>에서 이런 모습을 노래한다. 보컬 톤이 다른 둘이서 번갈아가면서 부르는 것도 좋고, 피아노로 시작한 곡에서 악기들을 더해 사운드를 늘려가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는, 또 너무 많아지는 너를, 이른바 사랑의 그 불가항력을 노래하는 가사가 정말 와닿는다.


'선명'이라는 단어가 슬프고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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