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과 우주

by 이경



0. '병신'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가, 하는 질문을 책에 쓰기도 했는데, 오늘은 써야지. 몰라몰라. 스스로 병신처럼 느껴지거나, 초라함을 느낄 때, 열패감에 휩싸일 때 언젠가부터 나는 우주를 상상하곤 한다. 이 드넓고 커다란 우주에서 나 하나쯤 병신짓을 해도, 그게 뭐 대순가... 하면서 우주를 이용한 비겁한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인데... 요즘 들어 우주를 상상하는 일이 많아졌다.


1. 서점에 가면 즐거워야 하는데, 요즘엔 서점에 가면 뭐랄까. 좀 시무룩하고, 심심하고, 또 열패감이 들어서 또 우주를 상상하게 된다. 이러다가 생전 안 보는 과학코너를 돌게 생겼네.

서점이 재미없어진 까닭으로는 순전히 내 기준에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책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변 작가들의 책이 많이 보이면, 박진영으로 빙의하여, 으으, 저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해, 그러면서 온갖 질투와 시기가...


2. 이렇게 우주를 상상하는 시간이 늘어날 때면, 새로운 책을 씀으로써 우주로 나가 있는 신경을 지구 안으로, 한국 안으로, 서울 안으로, 키보드가 있는 사무실 안으로 끌고 와야 한다.

책을 쓴다는 일은... 뭐랄까. 문을 하나 열고서 그 안에 한동안 박혀있어야 하는 일처럼 느껴진달까. 좀 외롭고, 괴롭고. 뭐 그런. 다음 책을 계약한 건 아니지만, 일단 쓰면 나랑 같이 하자, 하는 편집자님이 있다. 빨리 우주를 상상하는 일 따위 때려치우고, 문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번에는 문 열기가 너무 어렵네...


3. 최근 페친을 맺은 한 소설가 선생님의 신작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 하나의 이름이 '이경'인가 보다.

박완서의 소설에도, 최은영의 소설에도, 정미경의 소설에도 '이경'이라는 이름이 나와서, '이경'은 소설가들이 좋아하는 이름인가... 하는 글을 책 어디엔가 썼던 적이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이경'이라는 이름의 글쟁이들이 많아서... 내가 다 이겨버릴 거야,라고 다짐하곤 했는데, 요즘은 이기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맘 편하게 우주를 상상하곤...


4. 개인적인 친분은 없고, 페친의 페친으로, 혹은 공유가 되어 한 작가의 글을 가끔씩 보게 되는데... 이 사람의 글 특징 중 하나라면 종결어미 '... 말이다.'를 자주 쓴다는 것이다.

나는 다섯 종의 책을 내면서 '... 말이다.'로 끝나는 표현을 한 다섯 번 정도 썼으려나. 근데 이 사람은 느낌상 거의 매 꼭지당 '.... 말이다.' 하는 종결어미를 쓰는데, 이게 보고 있으면 뭔가 되게 관조적인 느낌이면서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라... 한 마디로 말이다가 말이다,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 사람이 글쓰기 모임이랄지, 뭐 그런 걸 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를 둘러싼 주변의 사람들도 종결어미 '말이다.'의 표현을 되게 많이 사용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글쓰기 모임이란 이렇게나 위험하단 말이다.


5. 이제 뻘글 그만 쓰고 다음 책을 위해 문 열고 들어가야지. 한글 새 문서를 열겠다는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국악방송 밤은 음악이야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