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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 김현식의 음악들

by 이경



11월 1일 - 김현식의 음악들


군대 대신이라지만 젊은 청춘에게 공장은 지루한 곳이었다. 한국 산업의 일꾼으로서 좋은 물건을 만들어 수출하여 나라 명성을 드높이자, 하는 사명감 따위 있을 리 만무했고, 이제나 저제나 시간이 흘러 소집해제일이나 빨리 왔으면 싶었지.


마음 맞는 젊은이들 몇 명이서 모여 저녁으로는 밥이며 술이며 회식도 가끔 하면서 지루함을 떨쳐냈는데, 11월 1일엔 꼭 구로역 애경백화점 뒤쪽에 위치한 일식집을 찾곤 했다. 살얼음이 떠 있는 소주병 안에 녹차 티백을 넣어서 내놓는 술집이었는데, 그게 좀 별미였다. 요즘처럼 온갖 과일 맛이 들어간 소주가 있지도 않은 시절이었으니까.


가끔씩 찾는 곳이었지만, 특히나 11월 1일에 꼭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일식집답지 않게 가게에선 고故 김현식의 음악이 자주 흘렀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부터 김현식이나 들국화, 조덕배 같은 윗세대 음악을 듣고 자란 탓에 친구들에겐 애늙은이 소리를 들어야만 하기도 했는데, 그런 애늙은이 음악 취향이 때로는 단골 술집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우연히 들른 일식집에서 김현식 음악이 흐르는 걸 듣고는 “김현식 좋아하시나 봐요? 저도 좋아하는데.” 하고 던진 물음이 인연이 되어 사장님은 내가 갈 때마다 말을 섞어주거나 이런저런 안주를 서비스 삼아 내주셨다. 나 같아도 이십 대 초반의 새파랗게 어린애가 김현식을 좋아한다고 하면 그게 조금은 예뻐 보였을 거야.


사장님, 저는요. 비가 오면 〈비처럼 음악처럼〉을 듣고요, 눈이 오면 〈눈 내리던 겨울밤〉을 들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는 너무 블루지 하고 좋지 않나요? 〈바람인 줄 알았는데〉 가사도 너무 좋죠? 근데 그게 바람이었을까요, 사랑이었을까요, 하는 푼수 같은 대화를 웃으며 즐겼다. 그 사장님, 못해도 나보다 열댓 살은 많았을 텐데. 음악은 이처럼 가끔 세대를 초월한다.


아, 그러니까 공돌이 시절 왜 유독 11월 1일만 되면 김현식의 음악이 흐르는 일식집을 찾았는가 하면, 그날이 바로 김현식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유재하가 1987년 11월 1일에 세상을 떠나고, 정확히 3년이 지나 같은 날 유재하와는 음악 동료였던 김현식도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11월 1일이면 구로역 애경백화점 뒤쪽에 위치한 일식집에 들러 “사장님, 김현식 노래 들으러 왔어요.” 하면서 우리끼리 현식이 형의 기일을 새겼던 것이다. 방위산업체로 근무하던 그 시절 몇 년간의 11월 1일을 그렇게 보냈다. 평소에도 김현식 음악을 자주 틀어주는 그 일식집에서 11월의 첫날엔 그 누구도 아닌 김현식

의 목소리만 흘렀으므로.


지루한 날들은 어쨌든 지나고 그렇게 기다리던 소집해제일을 맞아 공장을 벗어난 후로는 자연스레 그 일식집에도 발길을 끊게 되었지만, 여전히 매년 11월 1일이 되면 김현식의 음악을 찾아 듣고, 또 가끔은 유재하의 음악을 꺼내 듣기도 한다. 그리고 애경백화점 뒷골목 일식집의 그 사장님 생각도 한다.


여전히 일식집을 운영하시려나. 장사는 잘 되실까. 살가운 미소를 보이며 공짜 안주도 많이 주셨던 분인데 이름도 물어보지 못한 게 아쉽다.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이제는 길에서 우연히 스쳐 지난다 해도 서로를 알아보진 못하겠지. 지루했던 시절, 덕분에 조금은 즐거웠는데. 건강하게 잘 지내시면 좋겠네. 무엇보다 여전히 김현식 음악을 즐겨 들으실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일이 같다는 이유로 김현식과 유재하는 뭔가 영혼의 콤비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살아생전에는 음악 동료이기도 했고. 나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지 힙합 그룹 에픽하이는 두 번째 정규 앨범에 〈11월 1일〉이라는 제목의 곡을 수록하기도 했다. 기일이 같은 故 김현식과 故 유재하를 추모하는 곡이었다. 원티드의 김재석이 피처링한 곡의 노랫말은 일찍이 떠나간 두 뮤지션의 곡 제목을 이용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현식의 음악이 흐르던 술집까지 찾아 기념했던 11월 1일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개인적으로 기념할 만한 일이 하나 더 생겼다. 11월의 첫날이 되면 여전히 김현식과 유재하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혼자서 조용히 자축(?)하게 된 일이 생긴 것이다.


이십 대 초반 공장에서의 지루함을 답습이라도 하듯 이렇다 할 꿈이 없이 30대의 대부분을 지루하게 흘려보냈다. 꿈이 없는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무미건조한지. 그러다 삼십 대 후반에 문득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꿈 때문에 울고 웃는다지만, 이루고자 하는 것이 생기면서 심장이 다시 뛰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우연찮게도 2019년 11월 1일은 내 데뷔작 『작가님? 작가님!』의 출간일이기도 하다. 오랜 꿈이 실현되던 날.

“사장님, 김현식 음악 좋아하던 제가요, 김현식 떠나간 그날에 꿈을 이루었습니다. 참 재밌죠?” 얘기했다면 그 사장님 분명 넉넉한 웃음을 보이며 축하해 주었을 텐데.


이경 - <그 노래가 내게 고백하라고 말했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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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입니다.

김현식이 가고, 유재하가 가고.

2019년엔 제 첫 책이 나온 날이기도 하고요.

오늘 퇴근길엔 김현식을 듣는 걸로, 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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