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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May 02. 2024

아이와 애견카페에 들렀다



사용하는 언어가 바뀌면 사람들의 인식 또한 변할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 단어도 물론 있겠지만, 어떤 단어들은 꽤나 크게 사람들을 변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국립국어원에서는 표준 단어의 개정 작업을 해나가는 것일 테고.


개인적으로 이건 정말 사람들의 인식을 많이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는 단어가 있다. '애완견'과 '반려견'이다. 애완견이라고 부를 때는 분명 사람 아래 개가 있었던 수직 구조의 느낌이었는데, 반려견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정착되고서는 이제 사람과 개가 수평을 이룬 듯한 느낌이다. 더불어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옛말도 좀 더 설득력을 갖추게 된 것 같고.


그래서인지 나 또한 개를 바라보는 인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천천히, 하지만 아주 분명하게.

말하자면 40년 넘게 살면서 단 한 번도 개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부모님 또한 집에서 개를 키우시는 분들은 아니었다. 친인척 중에서는 대구 큰아버지 댁에서 만이 개를 키우고 있었다. 서울에 사는 우리 가족이 1년에 설날과 추석, 그렇게 두어 번 대구에 내려갔던 그때가 내 어린 시절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애완견의 기억이다.


큰아버지 댁에서는 '꼬딩'이라는 개를 키우다가 꼬딩이 죽고서는 '딩꼬'라는 이름의 개를 키웠다. 작명은 큰아버지가 하셨던 걸까. 워낙에 오래전 일이라 그 개들의 이름이 '꼬딩'과 '딩꼬'가 맞는지조차 가물가물해졌지만, 잔상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는 기억으론 그렇다.

나는 '꼬딩'과 '딩꼬'가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모른다. 자연사를 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자동차나 자전거 따위에 로드킬을 당한 것인지, 혹시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개장수나 개도둑에게 붙잡혀 누군가의 식탁 위로 올라가게 되었는지. 그때는 프랑스의 여배우 브릿지 바르도가 한국의 개식용 문화를 비판하기도 전이었으니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큰아버지 댁의 개를 한번 쓰다듬어 줄 시간에 옆에 있는 오락실에 한번 더 가는 게 좋았으니까. '꼬딩'과 '딩꼬'는 그야말로 개밥 먹고 크던 시골 잡종견이었는데 뭐 그렇게 예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개새끼들, 키워봐야 똥이나 싸재끼지.


그러던 내가 요즘에는 산책을 하다가 고개를 돌리는 일이 잦아졌다. 반려인과 함께 산책에 나서는 강아지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오게 되는 까닭이다. 얘는 얘대로 예쁘고, 쟤는 쟤대로 귀엽다. 특히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한 시바견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할 때면 주인에게 물어보고 한번 쓰다듬어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옛날에는 퍼석퍼석한 개털 만지는 것도 소름 끼쳐서 싫어했는데.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반려견'이라는 단어의 정착도 한몫했겠지만, 아들 1호의 영향도 적지 않다. 40년을 넘게 살며 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일절 하지 않던 나와 달리 아이는 어려서부터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성화를 부린다. "아빠는 너네 키우기도 힘들어, 개 키우면 똥은 네가 다 치울 거야? 산책은 네가 다 시킬 거야?" 하면서 완강하게 굴다가도, 개 키우면 아이들 정서에는 좋다고 하던데, 하는 육견의 장점을 조금씩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큰 아이와 쉬는 날 지하철을 타고 애견카페를 찾아 들렀다. 나처럼 소심하면서도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은 애견카페라는 곳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부터 찾아본다. 꼭 반려견이 없어도 출입이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강아지를 동반한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는 것인지. 실제로 요즘에는 애견동반인만 입장할 수 있는 애견카페도 늘었다고 한다. 다행히 아이와 함께 간 애견카페는 1인 1 음료 주문만 한다면 누구라도 입장이 가능한 곳이었다.


나는 집 주변 애견카페를 찾아보면서 이왕이면 상주견이 많은 곳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보고 헤어질 남의 개를 보기보다는, 상주견이라면 원할 때 다시 또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걸까. 내가 왜 이런 사사로운 잔정을 미리 걱정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 간 애견카페는 <혼자 두면 장판 뜯어서 차린 개 카페>라는 재미난 이름으로 건물의 3층에 있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강아지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 전 몇몇 안내를 들었다.


"저기 보이는 저 하얀색 강아지는 입질을 하니까 만지지 마세요. 아뇨아뇨, 걔 말고요, 얘요 얘. 먼저 다가오더라도 절대 만지지 마세요. 조금 이상하게 길들여져서 먼저 오고도 만지면 무는 애예요."


그놈 참 성격 별나네, 하는 생각을 하고서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데 사방팔방에서 멍멍, 왈왈, 바우와우 해대는 거지. 대충 봐도 스무 마리는 족히 넘어뵈는 강아지와 개들. 그렇게 카페 의자에 앉았는데 갈색 털을 한 푸들 한 마리가 점프를 뛰더니 내 허벅지 위로 올라탔다.


아, 얘 뭐냐. 너 뭔데 대체. 살면서 첫 만남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기 의지로 이렇게 나에게 와서 안긴 게 있었던가.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렇게 나는 한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이름 모를 푸들에게 한참 동안 내 허벅지를 내어주고 말았다. 마침 사장님이 음료수를 서빙해 주었을 때, 나는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탄 강아지를 가리키며 조용히 물었다.


"저기, 사장님, 얘는 상주견인가요?"

"아니요, 그 친구는 여기 유치원 온 거예요."


아니, 엄연히 주인도 있는 애가, 주인이 알면 섭섭해하겠다, 너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개들이 사람을 좋아하고 잘 따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푹 와서 안기는 걸 경험하니까 그 느낌이 또 새로웠다.


카페에는 예닐곱 마리의 상주견과 맡겨진 강아지들이 있었다. 푸들과 포메라니안이 있었고, 아주 작은 페키니즈와 시츄, 비숑도 있었다. 조금 덩치가 큰 녀석으로는 알래스칸 말라뮤트와 오드아이를 가진듯한 보더 콜리가 있었다. 보더 콜리가 와서 푸욱 안길 때에는 묵직하게 무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덩치나 어찌나 큰지 개가 숨을 쉴 때마다 내 몸으로 심장의 뜀박질이 느껴졌다. 그 무늬와 털은 어찌나 부드럽고 멋지던지. 털은 엄청 빠지기는 하더라마는.


카페 사장님과 직원들은 수시로 개들이 싸놓은 똥 오줌을 치우고 바닥에 휘날리는 털들을 정리했다. 나는 그 틈을 타 사장님에게 모르는 견종을 물어보면서 우리 가족의 상황을 공유하기도 했다.


사장님 얘는 견종이 어떻게 돼요? 아, 그렇구나, 네네. 아, 저희가 반려견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닌데요. 아이가 강아지를 너무 키우고 싶어 해서 한번 와봤거든요. 그러자 사장님은 아이에게, 개를 키우는 일이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반드시 책임감이 따라야 한다고, 사람이 초중고 12년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어 세상에 나가듯이 개들도 교육을 해줘야 하는데, 개를 키우는 사람들 중 일부는 그런 교육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도 해주었다.


나는 웃으며 아이에게 삼촌 말 잘 한번 들어봐, 하고는 나 몰라라 하며 다시 부드러운 보더 콜리의 등짝이나 어루만졌다. 그때 입장 전에 들었던 그 문제의 강아지가 내 앞으로 와서 등을 보이며 다소곳이 앉았다. 마지 자기 등을 쓰다듬어 달라는 듯이. 아, 사장님이 얘는 절대 만지지 말라 그랬는데. 먼저 이렇게 다가와놓고, 정작 만지면 무는 녀석이라니, 대체 얘는 어떤 심리로 이렇게 삐딱하게 되어버린 걸까. 결국 나는 예민하다는 녀석의 등은 한 번도 쓰다듬어주지 못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나오겠거니 했던 애견카페는 입장하고서 두 시간이나 훌쩍 지나서 나오게 되었다. 카페에 나와 카페 앞에 마련된 돌돌이로 옷을 밀었더니 개털이 한가득 묻어 나왔다. 이것 봐, 개 키워봐야 똥이나 싸고, 털이나 빠지지. 이걸 언제 다 치우고 있어. 기저귀 값 뗀 지 몇 년 안 됐는데, 이제 개사료 값 낼 일 있나. 반려견이고 뭐고 아서라 아서. 그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줄을 하고 반려인과 산책을 하는 개들을 보면 또 절로 고개가 돌아가는 나를 발견한다.


애견카페에서 눌러댄 핸드폰 카메라 셔터는 최근 들어 마주한 그 어떤 피사체들보다 많은 사진들을 남겼다. 고백하자면 2주 전부터는 동물훈련사 강형욱이 말 안 듣는 개들을 훈련시키는 티비 프로그램도 보기 시작했다. 글쎄. 그냥.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어버리더라고. 내 나이 탓인지, 단어의 변화 탓인지, 아이 탓인지. 아니면 자꾸만 보기 시작해서 알고리즘을 타기 시작한 소셜미디어의 동물들이 등장하는 짧고 귀여운 동영상 탓인지.


그나저나 나한테 와서 푹 안겼던 그 갈색 푸들의 이름은 뭐였을까.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아니야, 상주견도 아니고 내가 그 이름 알아서 뭐해. 그래도 그렇게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키우는 반려인은 행복하겠지. 먼저 다가와도 만지면 물고야 만다는 강아지를 키우는 반려인의 마음은 또 어떠할지. 8, 90년대 나 어릴 적에도 내 마음이 이랬다면 그때는 오락실 대신에 '딩꼬'랑 '꼬딩' 똥개라고 무시 안 하고 한 번쯤은 더 안아주었을 텐데, 하는 이제와 아무런 소용없는 뭐 그런 생각도 들면서.



옴짝달싹. 처음 보는 사이에 나한테 왜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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