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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May 10. 2024

그 사람은 원래 친절한 사람이었는지도 몰라



2021년 대학병원에서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장기 치료를 요하는 일이었기에 한동안은 실의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돌아보면 살면서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시간이었다. 터널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여하튼 진단 이후엔 이런저런 추가적인 검사를 받고 치료 계획을 세우고 한 달에 한번 이상은 병원에 들러 의사 선생님을 뵙고 상황에 따라서는 며칠씩 입원을 하기도 했다.


그때 해당 과에서 예약 등의 업무를 봐주던 직원이 있었다. 마르고 안경을 쓴 모습이 마치 옛 소설의 사감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였는데, 어딘지 늘 예민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환자나 보호자에게 쉽게 짜증을 내기도 했고, 누군가 말을 못 알아들으면 다시 설명하기에 앞서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불친절함 그 자체였다.


병원에서의 일이 힘들고 고된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몸이 아파서 온 환자들과 보호자에게 저렇게 목소리를 높이고 불친절하게 굴어도 되는 걸까. 왜 동료직원 그 누구도 저 사람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는 걸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그 직원의 특이상황이라면 홀몸이 아니었다는 것. 비쩍 마른 몸이라 앉아 있을 때는 몰랐지만, 서있는 모습을 볼 때 그는 금방이라도 아이가 나올 것 같은 만삭의 몸을 하고 있었다.


임신 중이었구나.


그리고 한 달 뒤쯤 시간이 흘러 다시 병원 대기석에 앉아 있을 때 만삭의 그 직원이 보이질 않았다. 다른 직원 분에게, 전에 여기 계시던 분은 육아 휴직 들어가셨나 봐요, 물었고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얼마 전에 아이를 낳았고 아마 오래 쉬게 될 거라고. 일 년이 될지, 이년이 될지.


그렇게 처음 병 진단을 받고 3년을 넘게 병원을 다니다가 며칠 전 병원에 들렀을 때 예의 그 직원이 복귀하여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이 나는 할 수 있는 치료를 모두 마쳤는데, 저 사람은 아이를 낳고 이제는 아이가 걸을 수 있을 때까지 키웠겠구나.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코로나로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이제는 병원에서 마스크를 벗어도 될 정도로 시간이 흘렀구나. 하세월, 그야말로 하세월.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 싶어서 직원분에게 따로 인사를 건네지는 않고 나는 대기실에서 진료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병원의 외래 진료라는 으레 그렇듯이 길면 3분이고 1분 진료도 허다하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 뵙기 위한 짧은 시간을 위해서 누군가는 부산에서도 올라오고 누군가는 광주나 제주도에서 올라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날은 유난히 진료 지연시간이 길어졌다. 여느 날도 보통 30분 정도의 지연시간이 있었는데, 의사 파업의 영향이었는지 두 시간 가까이 지연이 되었던 것. 결국 아침 일찍부터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한 영감님이 그 예민한 직원 앞에서 볼멘소리를 꺼내든다.


"이럴 거면 예약을 왜 받는 거요. 내가 아침 10시 반부터 여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두 시간이나 지연이 되는 게 말이나 됩니까."


나는 영감님의 호통을 지켜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저 직원분 까칠하신데, 저러다 괜히 싸움이라도 나는 건 아닌가. 그런데 나의 예상과 달리 그 직원 분은 나이 많은 어르신 환자에게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교수님 지금 식사도 못하시고 진료를 보고 계시거든요. 파업 때문에 조금 더 지연이 되고 있기도 하고요, 최대한 빠르게 봐드리긴 할 텐데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정말 죄송합니다."


한쪽에서 윽박지르더라도 다른 한쪽에서 부드럽게 나오면 강한 쪽은 이내 말랑해지기 마련이다. 결국 화를 내던 영감님도 직원분의 사과에 머쓱한지, "빨리 좀 해주쇼"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가 앉으셨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다가 진료실로 들어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나 역시 예약 시간은 오후 1시 50분이었지만, 실제 의사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은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였다. 얼마 전 했던 검사의 결과를 듣고, 약처방을 받고, 다음 진료 예약을 잡기까지 걸린 시간은 아마도 1분 남짓. 의사 선생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다시 대기실에 돌아와 앉았을 때, 그 직원 분이 말을 걸어오셨다.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정말 죄송해요. 다음 진료 예약이 세 달 뒤 오늘처럼 오후 1시 50분쯤인데, 아무래도 그때도 지연이 많이 될 거 같거든요. 환자분 집이 멀지 않으시니까, 괜찮으시면 아침 9시 이전에 진료 예약으로 변경해 드릴까요?"


"어... 네, 그래주셔도 좋고요. 근데 제가 진료날 피검사를 해야 하는데, 9시 이전에 피검사를 하려면..."


"아, 피검사는 전날 편하신 시간에 오셔서 미리 하셔도 되거든요."


"아, 그러면 제가 회사도 근처니까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근데 오랜만에 복귀하신 거죠? 혹시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되게 오랜만에 뵙는 거 같아요."


"아, 네네, 맞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고 왔습니다! 제가 환자분 기억은 하는데, 오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셔서 너무 죄송해서요. 그럼 아침 시간으로 변경해 드릴게요."


"아, 네네 감사합니다. 그때 육아휴직하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제 아이가 많이 컸겠어요. 저 처음 여기 다닐 때 선생님이 예약 잡고 해 주셨는데요."


뭐 이런 대화를 나누는데 왠지 모르게 무언가 뭉클하고 울컥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 실의에 빠져있던 내 모습을 보았을 저 사람이 여전히 나를 기억해주고 있다는 사실과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아야 했던 내 개인의 세월들이 스쳐 지나서였을까.

물론 그런 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던 저 사람이 사실은 어쩌면 환자들에게 몹시 잘하는, 친절한 사람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쩌면 사람은 출산 직전 어쩔 없는 호르몬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며, 나는 그것도 모른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을 불친절한 사람으로 오해하며 살아왔었는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활짝 웃으면서, 아이를 낳고 왔다고 씩씩하게 말하는데 이분 원래 이렇게 웃으면서 대화를 하는 사람이었구나 싶었던 거지. 어쩐지 계속 이야기 나누면 자꾸만 그 뭉클거림에 눈물이라도 나와버릴 것만 같아서, 그럼 수고하세요, 하고는 급하게 병원을 나와야만 했다. 왠지 기분 좋은 느낌.

다음 진료 예약은 세 달 뒤지만, 처방받은 약은 80일치라는 점도 그 기분 좋음에 한몫을 더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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