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사라질지 모를, 어느 노모의 14첩 나물 밥상
양평에서도 가장 동쪽 끝, 강원도 홍천과 경계를 맞댄 청운면은 한적하다 못해 고요하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도 한참을 헤매야 하는 조그만 동네 귀퉁이에 낡은 식당 하나가 있다.
그런데 이 집, 참 콧대가 높다. 전날 미리 전화를 넣어 “내일 한 자리 됩니까?” 하고 조심스레 물어야 비로소 자리를 내준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사장님의 무심한 목소리에 ‘무슨 백반집이 이렇게 유난스러울까’ 싶어 기가 좀 죽기도 하지만, 식당 앞에 서서 검게 그을린 아궁이와 묵직한 가마솥을 마주하는 순간 그 고집스러운 예약제에 대한 의문은 기분 좋은 확신으로 바뀐다.
듣기로는 이곳,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고 한다.
어머니가 아궁이 앞에 앉아 밥물을 맞추던 그 자리를, 이제는 백발이 성성해진 딸이 이어받아 지키고 있다.
낡은 문틈 사이로 밴 세월의 그을음과 냄새가 이 집이 견뎌온 60여 년의 내력을 묵직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예약 시간에 맞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별다른 말도 없이 14가지 나물 접시가 상 위로 차르르 깔린다.
평소 입 짧은 ‘투덜여사’와 동행해 넉넉하게 3인분을 주문했다.
고기 한 점 없는데도 상이 꽉 차는 게 묘하다.
사실 그렇다. 미리 무쳐놓으면 숨이 죽고 물이 나오니, 딱 올 사람만큼만 바로 무쳐내겠다는
주인장의 결벽 같은 진심이 이 발칙한 예약제 뒤에 숨어 있었던 셈이다.
가시오가피니 취나물이니 하는 산나물들의 아삭한 식감과 색감이 온전히 살아있는 건 다 그 고집 덕분이다
나물들 이름은 일일이 모른다.
이름 좀 모르면 어떤가. 이름 없는 것들이 건네는 인사가 더 다정할 때가 있는 법이다.
쌉싸름한 놈, 고소한 놈, 씹을 때마다 산 냄새가 훅 끼쳐오는 놈까지.
조미료 없이 소금과 직접 짠 기름, 그리고 아궁이 불 조절만으로 간을 맞춘 이 나물들은
젓가락질을 쉴 새 없이 재촉한다.
구색을 맞춘 고등어조림은 거들 뿐, 주인공은 단연 이 푸른 생명력들이다.
한 점씩만 맛봐도 밥 한 공기는 어느새 바닥을 보인다.
결국 한 공기 더 추가해 대접을 부탁했다.
옆 테이블 단골들 하는 걸 보니 안 비빌 수가 없었다.
14가지 나물을 산더미처럼 얹고, 된장국물 두어 숟가락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슥 둘러 비벼본다.
크게 한 술 떠넣으면 육천 원이라는 가격이 참 미안해진다.
요즘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으로 누리는 이 사치스러운 포만감은,
주인장이 대를 이어 60년 세월을 묵묵히 버텨준 덕분에 우리가 덤으로 얻는 것일 게다.
식당을 나와 불룩하게 솟은 배를 원위치시키기 위해 뒷길 강둑길을 천천히 걸었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시골 강변의 풍경이 방금 비워낸 비빔밥의 여운을 담담하게 씻어준다.
다만, 홀로 이 고단한 밥상을 차려내는 주인장의 백발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이 정직한 맛을 마주할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언제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을 이 귀한 풍경 앞에서, 예약 안 하면 국물도 없는
이 배짱 있는 식당의 자부심은, 존경스럽다.
상호명: 순흥식당 경기 양평군 청운면 용두로139번길 14
특징: 전날 전화 예약 필수, 14첩 산나물 백반 단일 메뉴
가격: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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