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시간 속에 썰어 넣는
추억 한 점

성북동과 명동의 배신을 뒤로, 동인천의 잉그랜드 왕돈까스

by 까칠한 한량

인천의 구석구석을 훑다 보면 시간의 결이 유독 두껍게 내려앉은 동네가 있다.

동인천 역 앞, 맥아더 장군이 내려다보는 자유공원 언덕 아래 자리한 '잉그랜드 왕돈까스'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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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부터 이 자리를 지켰다니, 내 나이 쉰여덟 중 사십 년 넘는 세월을 함께 늙어온 셈이다.

돈까스 좀 먹어봤다는 이들에게 성북동이나 명동은 일종의 성지다.


나 역시 결혼 전까지 성북동 근처에 살며 그 일대 돈까스집들을 집 드나들듯 했고, 학교 다닐 땐 명동의 유명한 식당들을 섭렵했다. 하지만 세월이 야속한 건지, 주인이 바뀐 건지, 요새 그곳들을 다시 찾으면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온다.


손님은 미어터지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았는데 정작 중요한 '추억의 맛'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리 접시에 담아놓아 겉면이 말라버린 단무지와 깍두기를 마주할 때면, 썰기 전부터 입맛이 반쯤 꺾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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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잉그랜드 왕돈까스는 지독할 만큼 고집스럽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80년대 어느 지점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낡은 소파와 낮은 조도, 중앙에 자리 잡은 분수대와 오래된 음악다방 같은 DJ 부스까지. 촌스럽다고 치부하기엔 그 공간이 품은 무게감이 상당하다.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라는 가벼운 단어로는 설명이 안 되는, 진짜 '빈티지'의 향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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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아 '잉그랜드 돈까스'를 주문한다. 빵과 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고민 끝에, 역시나 스프에 찍어 먹는 모닝빵을 택한다. 잠시 후 등장한 돈까스는 그 크기부터 압도적이다.


요즘 유행하는 두툼한 일식 카츠와는 결이 다르다. 고기를 얇고 넓게 펴서 바삭하게 튀겨낸 뒤, 그 위에 브라운 소스를 넉넉히 끼얹은 정통 경양식이다. 소스에 푹 젖어 눅눅해진 끄트머리부터 한 입 썰어 넣는다. 아, 이 맛이다. 너무 달지도, 시지도 않은 그 시절의 다정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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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백미는 셀프바에 있다. 앞서 언급한 '마른 반찬'의 서러움을 여긴 비웃기라도 하듯, 양배추 샐러드와 단무지, 깍두기가 신선하게 관리되고 있다. 무엇보다 탄산음료와 커피가 무료다. 주인장의 넉넉한 인심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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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생각한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단골집들은 하나둘 간판을 내린다.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불안한 시대에,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맛을 내어주는 공간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건 돈까스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음식을 먹으며 꿈을 꾸던 젊은 날의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잉그랜드 왕돈까스 인천 중구 우현로90번길 7 (혜성빌딩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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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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