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 남은 사람

프롤로그: 빛바랜 사진 속의 계절

by 까칠한 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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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세상은 온통 아날로그의 질감으로 가득했다.

삐삐 번호가 빼곡히 적힌 낡은 수첩, 동전 몇 개를 쥔 손으로 길게 줄을 서야 했던 공중전화 박스,

그리고 주말 저녁이면 텔레비전 앞에서 온 가족을 설레게 하던 '주말의 명화'.

나는 그 느리고 다정했던 시절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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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과 취업이라는,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을 코앞에 두고도 나는 기꺼이 방황하는 쪽이었다. 눅눅한 지하 연습실의 곰팡이 냄새, 스크린 속 배우들의 빛나는 눈빛, 그리고 밤늦도록 싸구려 소주잔을 기울이며 의미 없는 농담을 나누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세상의 전부인 양 시간을 흘려보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불안마저도 청춘의 특권인 양 만끽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하게도, 졸업장은 부끄러운 성적으로 채워졌다. 몇 군데 이력서를 무심하게 던져두고도 '설마 되겠어' 하는 마음으로 친구들과 허름한 극단을 만들 궁리만 했다. 하지만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경제 호황의 마지막 끝자락, 사회는 나처럼 준비되지 않은 청춘에게도 너그러웠다. 운 좋게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에 덜컥 합격했다. 4년간 장학금은커녕 학사경고의 언저리를 맴돌던 나로서는 실감 나지 않는, 과분한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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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몰랐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이 이렇게 우연히, 무심코 찾아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들이 향기처럼 오래도록 남아, 훗날 우리를 가장 깊숙한 곳에서 흔들어놓는다는 것을 말이다.





1장: 낯선 도시, 익숙한 이름


입사 후 6개월, 복사기 다루는 것조차 어설펐던 신입사원에게 미국 본사 출장이라는 기회가 찾아왔다. 난생처음 타보는 비행기, 처음 밟아보는 다른 대륙의 땅이었다. 한껏 들떠 있던 것도 잠시, 동행하기로 했던 부서 선배가 갑작스러운 가족상을 당하며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회의는 중요했고, 일정은 촉박했다. 결국 나 혼자 그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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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당일, 북적이는 인천공항 출국장 앞에서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잘할 수 있을 거야." 그 한마디에 실려 있던 흔들림 없는 믿음과 온기를 느끼며, 나는 두려움과 자신감을 반반 섞은 채 비행기에 올랐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구름들 사이로, 나는 처음 느껴보는 설렘과 책임감의 무게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 스물여섯의 나에게 뉴욕은 너무나 먼 곳이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그 도시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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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마천루는 거대했고, 사람들의 걸음은 나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빨랐다. 낯선 언어와 음식, 그리고 혼자라는 외로움 속에서 며칠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호텔방에서 보내는 밤이면, 시차 때문에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바라보며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의 웃음이, 그리고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던 그 온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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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큰 실수 없이 업무를 마치고 나니, 귀국 전날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마음의 여유가 찾아왔다. 나는 부모님과 그녀의 선물을 사기 위해 맨해튼의 밤거리로 나섰다.

11월의 뉴욕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코트 깃을 세우고 걸어가는 내 발걸음에는 처음으로 여유가 묻어났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거리를 걸으며, 나는 이 모든 경험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특별한 시간이 될지 알고 있었다.

부모님 선물은 스카프와 지갑으로 쉽게 골랐다. 하지만 8년째 내 곁을 지키며 내년의 결혼을 약속한 그녀의 선물 앞에서는 한참을 망설였다. 화려한 백화점 1층, 수많은 화장품들이 저마다의 향과 빛을 뽐내며 나를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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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그녀를 위한 선물을 고르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해왔으면서도, 정작 그녀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동안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 빼곡한 이름들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글자가 있었다. 샤넬 넘버 5. 영화 속에서, 잡지 속에서 수없이 보았던 익숙한 이름. 그것은 마치 낯선 세계에서 만난 유일한 아는 사람처럼 반가웠다. 깊은 생각 없이, 마치 정해져 있었다는 듯 그것을 집어 들고 계산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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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위해 선물을 고른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유일한 명품 브랜드를 고른 것이었다. 그 순간 가슴 한켠에 묘한 허전함이 스며들었지만, 이미 포장까지 마친 선물 상자를 바라보며 '그래도 좋아하겠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음 날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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