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그녀의 향기

샤넬 넘버 5

by 까칠한 한량


Whisk_da92eee24d.jpg


귀국 다음 날 저녁, 우리는 늘 만나던 혜화동의 작은 카페 창가에 마주 앉았다.

그곳은 우리만의 특별한 장소였다.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중요한 이야기들은 항상 그 창가 자리에서 나누곤 했다.


나는 잘 포장된 꾸러미를 조금은 쑥스럽게 그녀에게 건넸다.

출장 선물이 샤넬 넘버 5 향수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Whisk_19f13530a6.jpg


"와...."

짧은 탄성과 함께 그녀의 눈이 등불처럼 환하게 빛났다.


미안했다. 그녀의 기쁨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남자친구의 출장 선물이라며, 향이 너무 좋다며, 앞으로는 이 향수만 쓰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한다.

손목에, 귀 뒤에 향수를 뿌려보고는 연신 내 볼에 입을 맞추며 좋아하던 그녀의 모습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사실 아는 브랜드가 그것뿐이라 쉽게 고른 것이었는데, 그렇게까지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처음으로 가슴 한쪽이 아릿한 미안함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깨달았다. 선물의 가치는 그것을 받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때로 생각보다 단순하고 순수하다는 것을.



Whisk_2fe106ccb4.jpg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줄곧 손목에 향수를 뿌린 자리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정말 좋다"며

연신 웃어대는 그녀를 보며, 나는 미안하면서도 제대로 기쁘게 해주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받기만 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미팅으로 만나 8년을 사귀는 동안, 그녀는 늘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사람이었다.

나보다 먼저 취업해 철없는 남자친구의 데이트 비용을 더 많이 부담했고, 내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농담이 떠돌던 강원도 인제에서 군 복무를 할 때도 한 달에 한 번씩, 왕복 여덟 시간이 넘는 길을 달려와 주었다.


Whisk_db43bf4aa7.jpg


그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새벽 첫차를 타고 와서 저녁 마지막 차로 돌아가던 그녀. 살을 에는 겨울바람에 꽁꽁 언 볼로 버스에서 내리면서도,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던 그녀였다.

"뭘 이렇게까지 먼데까지 한달에 한번씩?" 한달에 한번 와주는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내가 물었다.

"그냥. 내가 좋으니까."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 그처럼 단순했다.



그런 그녀 덕에 나는 부대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면회를 오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는데, 그녀처럼 예쁘고 다정한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은 더욱 특별한 일이었다. 대대장님마저 "그 정성 지극한 아가씨"라며 그녀의 이름을 알 정도였으니.



제대 후, 졸업과 취업을 했을 때도 가장 기뻐해 준 사람은 그녀였다. 손수 고른 짙은 남색 양복을 들고 나타나, 환하게 웃으며 내 몸에 옷을 입혀주었다.



Whisk_ddf656a9de.jpg


"어때? 멋있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어주며 그녀가 물었다.

"음... 그냥 그래."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에이, 모르는 소리. 완전 신랑감이야!"


거울 속에 비친 어색한 내 모습보다, 그걸 바라보는 그녀의 뿌듯한 얼굴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녀에게 나는 늘 최고였고, 가장 멋진 남자였다.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 앞에서 나는 때로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더 고마웠다.


그 후로 그녀는 정말 샤넬 넘버 5만 사용했다. 퇴근 후 약속 장소인 커피숍에서, 주말 오후 교보문고의 책장 사이에서 그녀를 기다릴 때면, 그녀가 등 뒤에서 나를 살며시 안기 전에도 나는 그녀가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바람을 타고 먼저 도착하는 그녀만의 향기가 늘 나를 먼저 반겨주었다.


Whisk_7f44732f01.jpg



그 향기는 단순히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그녀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따뜻함, 그녀의 설렘, 그녀의 사랑, 그리고 그녀의 하루 종일의 이야기들. 나는 그 향기를 맡으면서 그녀의 하루를 함께 들여마시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그녀의 부모님이 집을 비운 틈을 타 처음으로 그녀의 방에 들어갔을 때, 나는 화장대 위를 보고 말을 잃었다. 내가 사준 향수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고이 모셔져 있었고, 그 옆에는 그녀가 따로 산 똑같은 샤넬 넘버 5가 놓여 있었다.


Whisk_67035f036d.jpg


"왜 안 써?"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조용히 이유를 물으니, 그녀는 내 팔짱을 끼며 비밀스럽게 웃었다.


"아주 나중에 우리가 결혼해서 예쁜 딸을 낳으면, 그 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때 선물로 줄 거야. 아빠가 엄마에게 처음 사준, 세상에 하나뿐인 향수라면서."


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바보야, 그때까지 향이 남아있겠냐"

며 핀잔을 주었지만, 그녀는 늘 그런 식으로 나를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우리는 이미 결혼해 있었고, 예쁜 딸까지 있었다. 그 미래에 대한 확신, 그 꿈에 대한 간절함이 향수병 하나에도 스며있었다. 그 향수병 안에는 어쩌면 향기보다 더 진한, 그녀의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Whisk_14ce916de6.jpg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랑이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함께 꿈꾸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꿈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이전 02화향기로 남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