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대화

by 까칠한 한량


피던 담배를 꼭꼭 눌러 끄고 안으로 들어와 주섬주섬 노트북과 짐들을 챙기고, 빈 잔을 들고 카운터에 놓고

나를 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가벼운 눈인사를 건넨다.


"제가 방해했나요?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아니라고 말하려는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간다.


"서천... 가보고 싶은 동네네요. 혹시 선생님은 가보셨어요?"


순간, 생각지도 않은 말이 내 입에서 내 의사와는 다르게 터져 나왔다.


"네, 근간에 자주 다녔죠. 같이 가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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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나옴과 동시에 나는 내가 뱉어놓은 말에 순간 움찔하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 찰나의 순간에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까? 내 뇌리에 위기를 극복할 만한 수많은 생각과 단어들이 흘러가며, 안 좋은 머리로 순간 조합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네, 그럴까요? 같이 갈래요? 가게 되시면 연락주세요. 기다릴게요."


내 짧은 머리에 가득한 생각과는 정반대의 답을 들은 나는 황급히 말한다.


"네? 네, 그럴게요. 그럼..."


내 떨리는 마음을 가벼운 웃음으로 포장, 위장하고 황급히 그녀의 가게를 나왔다.


바벨탑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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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던 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참 맑다. 어제도 이랬나?

집에 돌아와서도 소파에 누워 그녀 생각뿐이었다. 토요일이 좋겠어. 아니지,

그녀가 괜찮은 시간을 물어보고 맞춰야지.

달력을 바라보다가... 아, 연락. 연락을 달라는데 난 그녀의 연락처를 모른다. 이런 젠장.



새벽 4시.


연락처를 모르는 걸 안 지 8시간여가 지났다. 내일 가서 연락처를 물어볼까? 아니면 약속을 정하고 올까? 그녀가 마음이 변했으면 어쩌지? 그녀가 남편이 있는 여자면 어쩌지? 혹시 앞집 할머니처럼 그녀가 나를 전도하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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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왕이면 일요일 오전마다 그녀가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서 지옥이란 단어가 나보다 더 달콤하게 들릴 사람이 있으려나?


나는 그녀의 짧고 강력한 그 말,

그 한마디에 밤새워 그녀와의 바벨탑을 쌓았다 허물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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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독백


초저녁에 켜놓은 TV는 혼자서 시간마다 주인공을 바꿔가며 밤새 웃고 울다를 반복하다 지쳤는지, 지금은 뉴스가 나오고 있다. TV 속 뉴스 앵커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아파트 후 분양에 관해 지껄이고 있다.


그런 앵커를 쳐다보며 나는 생각한다. 내일 어떻게 지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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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구르며, 또 나는 바벨탑을 허물기 시작한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쌓아올렸다가도, 현실이라는 바람 앞에서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는 모래성 같은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또 5시 50분이 되면 나는 집을 나설 것이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가늘고 짧은 다리로 그녀의 커피숍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그것이 중년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도 절실한 표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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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바벨탑이 무너진 후에


그 후로 일 년이 흘렀다.

결국 그녀와 서천에는 가지 못했다. 며칠 후 다시 카페에 갔을 때, 그녀는 여전히 밝은 미소로 카푸치노를 건네주었지만 서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나 역시 그 약속을 상기시킬 용기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맞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가끔 그 커피숍 앞을 지날 때가 있다. 새로운 직원이 카운터에 서 있고,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들어가서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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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짝 사랑은 그런 것이다. 완성되지 않아도 아름답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충분히 소중하다. 내가 쌓았던 바벨탑은 결국 무너졌지만, 그 잔해 속에는 여전히 반짝이는 무언가가 남아있다.


5시 50분이 되면 여전히 가슴이 설렌다. 다른 카페에서, 다른 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아직 꿈꿀 수 있다는 증명이다.


서천에는 혼자 갔다.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녀와 함께 보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잠깐, 혼자만의 서천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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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고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좋은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 여행도, 전하지 못한 마음도, 무너진 바벨탑도 모두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나를 조금 더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지금도 새벽 4시면 가끔 잠에서 깬다. 더 이상 그녀 때문은 아니다.

그저 나이가 들어서다. 그 시간에 문득 생각한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고, 바벨탑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쌓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의미라는 것을.



그녀가 어디선가 행복하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5시 50분이 내게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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